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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정보
상세설명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 보현산(普賢山)에 자리한 보현사(普賢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서 보현사는 대관령과 선자령 바로 아래에 자리하여 산세가 높은 만큼 주변 경관이 뛰어나고, 대웅전·영산전·지장전·삼성각.금강루 등의 전각들이 법식에 맞게 자연과 잘 어울려 있어 산사의 그윽한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강릉IC에서 나와 오른쪽 성산(城山) 방향으로 2㎞ 가량 직진하면 성산면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관령 방면의 옛길을 따라 가면 된다.
고속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지나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관령 옛길을 따라 가다 보광리로 가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곡을 끼고 4㎞가량 들어가면 보광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됨)가 보이는 다리가 보이고 이 다리를 지나면 이 곳이 보광리 입구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한적한 시골마을 찾아가는 장면을 연상하는 길들이 이어진다.
보광리 입구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완만한 산길을 5㎞ 정도 올라가면 보현사 입구를 알리는 석물들과 부도밭이 나타난다. 이제 약 300m가량만 더 나아가면 아름다운 사찰, 보현사가 나타난다. -
소개·새소식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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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사 전각 배치도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5
보현사의 가람배치는 중정식(中庭式) 산지가람배치(山地伽藍配置)를 따르고 있다.
중정식 가람배치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배치된 모습이다.
보현천을 따라 산길을 걸어오면 보현사에 들어섬을 알려주는 석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방하착(放下着)’이라고 쓰여진 바위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쓰인 바위가 보이고 조금 더 오르면 부도전이 보인다. 그리고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쓰인 바위를 지나 드디어 보현사의 경내에 들어서게 된다.
길 오른편에 보물 제192호로 지정된 낭원대사탑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보현사를 중창했던 낭원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인데, 귀부와 탑신, 그리고 머릿돌에 해당하는 이수(螭首)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금강루(金剛樓) 아래의 계단을 통해 경내로 진입하면 정면으로 대웅보전과 영산전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로 지장전, 수선당, 보현당이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전각들이 중정(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으니 산지가람 중 사동중정(四棟中庭)형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사동중정형의 가람배치는 주불전, 문루, 좌우요사채의 4개 전각이 가운데 마당을 감싸고 있는 가람배치를 말한다. 금강루와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에 놓였으니 가람배치의 중심축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대웅보전 계단 바로 앞에 일부 부재가 없어진 석탑이 놓여 있고, 세월의 풍파를 못이긴 석조 사자상(獅子像)도 있다. 이 사자상은 아마도 석등의 간주석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부재와 사자상 등 석물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한 때는 탑과 석등 등을 갖춘 위엄있는 가람으로서의 사세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각 옆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몇 분을 걸으면 보물 제191호로 지정된 낭원대사탑이 있다. 그리고 수선당 옆에는 「동정각(動靜閣)」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종각이 있다.
종무소가 있는 보현당의 뒤편으로 공양간 및 템플스테이공간이 되고 있는 오관당과 지장선원, 선불장이 있다.
오래된 전각들을 중심으로 가람배치의 형태를 추정한다면 대웅전과 금강루를 잇는 축을 중심축으로 보현천을 바라보는 남향이었으며, 과거에는 보현천 주변의 산길을 따라 사찰 경내로 진입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변 지형의 경사가 급한 편이지만 보현사 주변의 평지규모가 비교적 큰 것으로 보아 사찰의 규모도 컸던 것으로 유추된다. 산의 능선에도 부속암자였을 것으로 보이는 암자터가 남아 있다. -
- 보현사 전각 대웅보전(大雄寶殿)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5
강원도 유형문화재
이 건물은 처마를 받쳐주는 공포를 기둥 사이에도 설치하는 다포식 건물로 기단은 장대석을 4단으로 쌓은 네벌대기단이며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초석에 맞추어 기둥의 밑면을 깎는 ‘그랭이질’을 하여 세웠다.
전각안에는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아마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전각의 이름이 대웅전이라 전각과 부처님이 일치하지 않지만 이러한 일은 조선후기에 흔히 발견된다. 아미타부처님의 수인임에도 석가모니불의 수인과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왼손은 전형적인 아미타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상투처럼 생긴 육계와 머리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소라처럼 생긴 모발이 촘촘하게 표현되는 등 전형적인 17세기 불상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의 왼편에 계신 보살의 보관에 작은 아미타불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이 분명하며, 맞은 편 보살은 대세지보살이 된다. 이를 보면 중앙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성수법을 보면 삼존이 동시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불행히도 복장유물은 대부분 도난을 당했는데, 다행히도 조성기는 남아 정확한 제작시기가 1691년 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1799년에 조성한 신중탱화 한 점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대웅보전편액의 글씨는 연선(蓮仙)이란 분이 남긴 명필이다.
주련
마하대법왕 摩訶大法王 거룩하고 위대하신 법왕님은
무단역무장 無短亦無長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으시며
본래비조백 本來非皁白 본래 검지도(黑)않고 희지도(白) 않지만
수처현청황 隨處現靑黃 모든 곳에 근기따라 황청으로 나타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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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사 전각 석탑부재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5
대웅전의 어간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석사자상과 탑의 부재, 석등의 부재 그리고 2019년에 대웅전 해체복원 시 발굴과정에서 나온 조각난 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있다.
부재들은 9세기 ~ 10세기에 만든 작품들이다.
석탑부재는 연화문이 조각된 방형(사각형)의 석등 하대석 부재 위에 놓여 있다.
원래의 자리는 대웅전 앞 중정(중앙마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석은 좌상인 사방불이 모각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1층 탑신석이 확실하고, 위의 옥개석은 탑신석의 폭과 최하단의 옥개받침 너비의 비율, 남아 있는 옥개석 2점의 체감율을 계산하면 1층 옥개석이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옥개석 사이에 있는 부재는 노반석이 거꾸로 끼워져 탑신석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위층의 옥개석은 윗면에 찰주공이 있으므로 3층 옥개석으로 보는 것이 맞을듯하다. 가장 위에 놓인 부재는 복발로 반이 갈라진 상태이다. 옥개석은 전각부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옥개받침은 4단이다.
그래서 원형은 3층 석탑이었으나 현재는 2층만이 남아 있는 탑의 부재들이다. 기단은 모두 없어졌고 옥개석 2점, 탑신석 1점,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강릉시 방내리와 강릉시립박물관에는 1층 탑신에 사방불이 모각된 탑과 탑부재가 남아 있는데 이들 탑부재와 보현사 경내의 탑부재를 참조하여 신라 말의 사찰의 규모와 보현사의 원형을 상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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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사 전각 석사자상(石獅子像)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5
대웅전의 어간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석사자상과 탑의 부재, 석등의 부재 그리고 2019년에 대웅전 해체복원 시 발굴과정에서 나온 조각난 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있다.
부재들은 9세기 ~ 10세기에 만든 작품들이다.
석사자상은 세월의 풍파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사자가 직립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부처님을 향한 뜨거운 장엄을 보여주고 있다. 사자상은 엉덩이와 뒷발을 땅에 붙이고 허리를 곧게 세워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세운 형태이다. 대좌(臺座)는 양 뒷발과 엉덩이가 붙은 자리 주변으로 둥글게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56cm이고, 현재 앞발과 머리가 심하게 훼손되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석등의 간주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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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사 전각 영산전(靈山殿)
- 작성자/작성일
- 두레박 24-04-25
보현사의 나한기도도량
영산(靈山)은 영취산(靈鷲山)의 준말로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셨던 법회장소 또는 법회의 모습을 말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산전은 주로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영산회상도를 봉안하고 제자상들을 함께 모셔 법화경 설법상을 묘사하기도 하고, 주위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묘사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시기도 한다.
보현사 대웅보전의 왼쪽에 있는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서 1955년에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편액과 주련은 불교계 대강백 탄허 큰스님께서 쓰셨다. 보현사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로서 이루어진 석가삼존불상을 모셨고, 그 좌우에 16나한상과 양 끝에 범천, 제석천, 2구의 사자(使者)가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흙을 빚어 만든 소조(塑造)상이다.
석조여래삼존상
석조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石造如來三尊像및十六羅漢像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신 연등불이시고, 석가모니불은 현재불, 미륵보살은 미래불이니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모셔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한(羅漢)은 최고의 깨달음(아라한과)을 얻은 성자(聖者)를 일컫는 말로서 부처님 당시의 제자님들이다. 16분의 나한상은 각각의 특징에 맞게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한상에 이어 양끝부분에 앉아 계신 분은 범천과 제석천이고, 끝에 두루마리같은 것을 들고 서계신 분은 각기 직부사자와 감재사자이다. 범천은 힌두교의 최고신인 ‘브라흐만’이고, 제석천은 전쟁의 신에 해당되는 ‘인드라’인데 두 분 모두 불법에 귀의하여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이 수용되었다. 그리고 직부사자와 감재사자는 지옥사자들로서 들고 있는 두루마리에는 죽은 자의 선악행실이 적혀있다고 한다.
십육나한상
십육나한상
석가모니불상은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특히 왼쪽 팔에 표현된 Ω모양의 옷주름은 16세기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수인은 오른손은 오른 무릎 위에 얹어 촉지인을 짓고 있으나 왼손은 배 앞이 아닌 오른발 위에 두고 있는 것이 여느 석가모니불상과 다르다. 좌우 협시보살들도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슴 밑에 레이스처럼 주름이 잡힌 옷주름이라든가 지나치게 높이 올려묶은 보계(寶髻), 그 위에 얹힌 무늬없는 보관은 조선시대 불상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렇게 석가삼존불상이 16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남다른 특이점들을 갖고 있어서 제작시기에 대한 논란을 불러온다. 16세기의 불상이 아니면 16세기 양식을 모본으로 하여 19세기에 만들어진 불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삼존불상을 제외한 나한상과 범천, 제석천 등 나머지 조각상들은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현사의 나한기도가 영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바로 이 영산전의 나한님들께 기도를 올릴 경우 그 영험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주련
나반신통세소희 那畔神通世所稀 나반존자님께서 신통력으로 세간의 중생들을 기쁘게 하심이며,
행장현화임시위 行藏現化任施爲 행적을 감추시고 나타내고 화현하시고 베푸심을 자유롭게 하심이며,
송암은적경천겁 松巖隱跡經千劫 소나무와 바위에 흔적을 감추시길 천겁동안 하시면서,
생계잠형입사유 生界潛形入四維 인간계에 형태를 감추고 사유사방에 몸을 나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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