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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불교 현지사 춘천본사 현지사 연꽃
-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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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현지사 연꽃-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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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현지사 연꽃 로고의 의미
2600년 전 부처님 당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꽃을 가섭존자에 들어보이자 가섭존자가 빙그레 미소지은 염화미소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현지사에서는 염화미소의 연꽃을 교단을 상징하는 심벌로 채택하였습니다.
연꽃 디자인 의도
연밥 안의 씨앗 3개는 삼보(三寶)인 불⬝법⬝승을 상징하며, 10개의 연꽃 잎은 시방(十方)의 의미로서 시방의 모든 법계 불·보살께서 불⬝법⬝승 삼보를 옹호하고 찬탄한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가사의 색상이기도 한 금적색을 심벌의 주색으로 삼았습니다. -
영산불교 현지사 춘천본사 현지사 종지 및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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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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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현지사 종지 및 사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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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종지
팔정도 칭명염불로 삼계지존 남섬부주교주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삼계를 탈출하여 정토보살이 되며 나아가 붓다가 된다.
사상
1. 중생은 스스로 업을 지어 육도를 윤회생사하며 윤회생사의 주체는 영혼체이다.
2. 불과를 이룬 부처님들은 마음 안도 아니고 마음 밖도 아닌 유무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 여여히 계신다. 지혜 복덕과 원력과 자비, 항하사의 신통과 위신력을 지니시며 천만억 아승기 색깔의 무량억종광 빛으로 이루어진 32상 80종호의 거룩한 모습의 인격적 우주적 존재이시다.
3. 깨달음은 불보살로 나아가는 공부의 시작이다. 윤회를 벗어난 해탈오계로서는 아라한, 무루대아라한, 보살, 불의 적멸세계가 있다.
5대 수행덕목 (행동강령)
첫째, 부모 조상님께 효를 다하고 스승님을 공경한다.
둘째, 나라에 충성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셋째, 부처님의 실존하심을 믿고 가르침에 따른다.
넷째, 법과 계율과 질서를 내 목숨처럼 지킨다.
다섯째, 자비 이타행으로 보살행을 실천한다. -
영산불교 현지사 춘천본사 현지사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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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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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현지사 연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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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1998년 9월 광명 만덕 큰스님 염불삼매에 들어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과를 증득함
2000년 1월 자재 만현 큰스님 부처님을 친견, 불과를 증득함
2000년 5월 춘천시 교외 대성산 자락에 현지사 창건
2005년 5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Ⅰ> 출간
2006년 1월 춘천본사 삼불보전 점안 개원
2006년 2월 부산분원 개원
2007년 7월 영산불교 창교선포식
2008년 11월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Ⅱ> 출간
2008년 11월 춘천본사 비로자나불 점안 및 대적광전 개원
2009년 5월 춘천본사 다보불탑 점안 봉불
2009년 12월 대전분원 개원
2010년 3월 영산불교대학(대전분원) 개교
2010년 5월 춘천본사 석가모니부처님 점안 및 대웅보전 개원
2011년 5월 춘천본사 석가불탑 점안 봉불
2012년 2월 고성분원 약사부처님 점안 및 약사성전 개원
2012년 3월 대구분원 개원
2012년 7월 제주도 제2본산 개원
2015년 4월 일본분원 개원
2018년 9월 <염불삼매> 출간
2020년 10월 김해분원 개원 -
대한불교조계종 원당암 원당암 건립배경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원당암 건립배경-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고대에 속하는 유물은 대부분 원당암이라 불러지는 산내(山內) 속암(屬庵)에 있다. 물론 청량사라고 불려지는 가까운 거리의 사찰에도 중요한 석조유물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는 원당암이 해인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절의 본래 이름이 봉시사(鳳棲寺)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대에 와서부터 각간(角干) 위홍(魏弘)의 원당(願堂)으로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이라고 하는 별칭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진성여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2년(888)에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 당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진성여왕은 즉위 11년이 되는 897년 6월에 왕위마저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北宮) 해인사에 머물다가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웃한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또한 진성여왕은 즉위 전에는 이미 북궁공주(北宮公主)라고 불려졌고, 또한 이때의 북궁은 신라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해인사를 가리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원당암에 있는 중요 유물들은 대체로 진성여왕 대에 와서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지목되면서부터 이곳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제작은 888년에서부터 897년에 이르는 약 10년 사이의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현존하는 중요 석조 유물로는 보물 제 516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그리고 배례석을 비롯하여 보광전의 축대 등을 지목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보광전 전방에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먼저 석탑은 특이한 청석탑이다. 이같은 청석탑은 국내에서 흔치 않은 이른바 점판암 계통의 석재를 이용한 공예적 소탑이 주종을 이룬다. 이 탑 역시 현재의 총 높이는 240cm에 지나지 않는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포함하여 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대리석 탑신부를 마련하였고, 탑신의 네 모서리에는 독립된 석주를 배치하여 상부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초층 탑신부는 공간을 형성하여 내부에 사리 장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초층 탑신 상부에는 각층에 옥개석을 받쳤던 탑신석이 본래부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탑의 체감률이 거의 없어 옥개석을 포개 넣은 듯하다. 곧 연화문 갑석 위에 모두 10매의 옥개석을 차례로 쌓아 두었고, 최상부에는 약간 불완전한 노반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석등 역시 특이한 형태였다고 짐작된다. 곧 점판암을 이용한 희귀한 자료로서, 견고한 화강석 간주(竿柱)를 이용 하여 시각적으로 단조롭게 처리되었다. 불을 켜는 화사석은 결실되어 알 수 없으나 이 석등의 본래의 모습은 우아한 기품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간석을 받치고 있는 6각 점판암의 하대석 역시 6면에 6엽의 복련을 아름답게 조각하였고, 시원하게 솟은 6각의 간석 위에는 연화문을 지닌 상대 받침석과 옥개석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등의 화사석이 없어져 현재는 전테 높이 180cm에 불과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것은 점판암과 화강석을 혼용하여 높이 솟은 화강석 간석 위에 화사석을 배치한 혼용의 석재를 이용하였고, 또한 하대석 아래의 화강석 지대석은 이 석등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 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하에 적용된 연화문 조각은 그 기품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청석탑 좌측에 있는 배례석은 보광전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 그것은 이 돌 위에서 예배하는 상징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건립 초기부터 이렇게 길이로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배례석의 상부 판석 중앙에는 직경 22.5cm의 연화문을 두텁게 양각하였고, 다시 7.5cm의 연꽃 자방(子房)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 위에서 예배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을 향하여 길게 놓이는 배례석도 있으므로 배례석의 용도는 그 위에서 예배하기보다는 향료와 촛대 등 의식 용구를 배치하였던 것 으로 짐작된다.
곧 배례석이 위치하는 곳이 석탑의 전면인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에 의식 용구를 놓고 법요(法要)를 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곧 큰 법요 때에는 그 전방 누각 건물에서 의식을 집행한 조선시대 이후의 사례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이 배례석의 전체 길이는 93cm에 폭 47cm, 그리고 높이 33cm의 한 돌로써 제작되었다. 배례석의 측면에는 안상을 조각 하였는데 이들은 전후에 각각 두 구 그리고 측면에 한 구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따라서 그 크기로 미루어봐서도 배례석 위에서 직접 예배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원당암의 주된 법당인 보광전의 축대를 주목해야겠다. 이 축대는 보광전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특이한 작품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보기 어렵다. 그 높이는 약 40cm에 불과한 나지막하지만 정성이 스민 품격 있는 작품 이다. 상부에는 아름다운 몰딩과 연꽃모양을 지닌 머릿돌을 넓은 판석으로 배치했고, 그 아래 면석은 폭 약 51cm, 높이 약 27cm의 아름다운 안상을 조각하였다. 안상의 형태는 배례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이같이 보광전의 축대에까지 안상과 연화문을 새겨 존엄을 표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것 역시 어쩌면 진성여왕의 여성적 섬세함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이상 보광전의 석조물의 성격은 모두 위홍 각간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여 조성한 진성여왕의 배려가 도처에 엿보인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의 중요 석조물은 모두 신라 왕실의 배려 아래 조성되었음은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청석탑을 비롯 하여 석등, 배례석 그리고 보광전의 축대에 이르기까지 그 조형 양식 등은 모두 자그마한 원당적 성격을 배경으로 하여 조성되었다고 하겠다. 동시에 그것은 혜성대왕 원당이 곧 진성여왕의 원찰(願刹)이었던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룩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
대한불교조계종 희랑대 희랑대 지장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희랑대 지장전-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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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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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희랑대 희랑대 독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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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희랑대 독성전-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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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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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희랑대 희랑대 설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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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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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희랑대 설법전-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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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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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희랑대 희랑대 사찰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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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희랑대 사찰소개-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희랑대(希朗臺)와 희랑조사(希朗祖師)
해인사 희랑대는 해인사 중창주(重創主)이신 희랑조사께서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을 수행하시던 장소로, 수행하는 가운데에 주변의 지형(地形)과 산세(山勢)가 나반존자(那畔尊者)의 도량(道場)과 흡사하다는 것을 살피시고, 평소 좌선(坐禪)에 드시던 바위 옆에 소나무를 심고서 도량을 창건(創建)하게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희랑대는 지대(地帶)로 보아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기묘(奇妙)한 지형과 수승(殊勝)한 풍치(風致)가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다. 이곳이 금강산(金剛山) 보덕굴(普德窟)에 비유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희랑대 독성전(獨聖殿)에 모셔진 독성(獨聖) 나반존자는 그 가피(加被)와 영험(靈驗)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오랜 세월동안 숭앙(崇仰)을 받아 왔으며, 기도의 성취(成就)와 감응(感應)은 물론 독성의 현신(現身) 등의 영험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 후 보광성주화상(普光性株和尙)께서 퇴락한 독성전을 중창하였으며, 지장전과 설법전과 요사채 등 도량의 규모를 일신하여 갖추었다.
희랑스님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복전(福田)이자 존사(尊師)로서 고려의 건국(建國)을 돕고, 왕실과 국가의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중창한 대공덕주(功德主)로서 나반존자를 본사(本師)로 모시고 수행하셨다. 희랑스님은 평소 희랑대 독성전 옆의 안장바위(엉덩이바위)에서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들어가 참선 수행하시면서 희랑대 주변의 산세와 정면으로 보이는 노적봉과 백년암 방향의 동쪽 바위 등의 지형을 관망하시고, 본사로 모시는 나반존자께서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자취를 숨긴 도량(송암은적 松巖隱跡)과 흡사하다고 느끼시고서 이를 계기로 참선하시던 바위 옆에 독성각을 짓고 나반존자를 봉안하여 희랑대를 창건하셨다.
그러므로 희랑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山勢)와 지형이 희랑대에 나반존자를 모시게 된 결정적인 요건이며, 희랑대 자체가 나반존자가 자신의 자취를 숨긴 도량과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희랑대를 창건하신 희랑조사는 나반존자를 본사로 모시고서 나반존자의 수행을 흠모하며 수순(隨順)하셨는데, 입적(入寂)하신 후에도 나반존자의 선례(先例)를 따라 자취를 스스로 숨기고자 비문(碑文)이나 영정(影幀) 등을 남기거나 허락하지 않으신 것에서 희랑스님의 뜻과 의지를 미루어 짐작하고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애끓는 추모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후학들은 희랑스님이 남기신 유지(遺志)를 어기지 않으면서 스님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내고자 하는 일념(一念)으로 희랑조사상(希朗祖師像)을 조성(造成)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역사적으로 희랑스님만이 유일하게 목조조상(木造彫像)의 진영(眞影)을 남기게 된 것이다. 유추하건데 희랑스님께서는 말세(末世)의 중생들을 위해서 스스로 나반존자로 환생(還生)하여 중생들의 기도와 소원과 정성에 감응(感應)하시고자 하는 교화(敎化)와 원력(願力)의 의지로 희랑대를 창건하고 희랑대에 주석(駐錫)하였던 것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희랑대 희랑대 사찰연혁 및 유래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희랑대 사찰연혁 및 유래-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4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로 모기를 불러모아!
희랑대는 그 암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희랑조사가 머물던 곳이다. 희랑조사(889~956)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해인사의 고승이다. 화엄학(華嚴學)의 대가였던 스님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해인사를 중창하기도 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조사도(祖師圖·1892년 제작)'를 보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 이정 스님과 함께 그려질 만큼 희랑조사는 불법을 크게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자연이 이루어낸 기묘한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일찍부터 금강산 보덕굴에 비유되곤 했던 희랑대는 희랑조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스님이 희랑대에 머물던 무렵 가야산 해인사에는 모기가 많기로 유명했다. 수도를 하는 스님들이 모기 때문에 정진을 못하자, 희랑조사는 자신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해인사의 모든 모기들은 희랑대로 모여들었고, 다른 스님들은 편안히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늘의 신장(神將)을 부를 정도로 희랑조사는 법력이 높았다는 얘기도 있다. 후삼국 시대의 전란을 딛고 화엄종을 중흥시킨 희랑조사의 업적을 두고, 스님과 교분을 나눈 고운 최치원은 여섯 수의 시에서 스님을 문수보살에 비유하고 있다.
희랑대 뒤 큰 바위 곁에는 희랑조사가 심었다는 노송 한 그루가 있었으나 10여 년 전 말라 죽었다. 희랑대 뒤 삼성전(三聖殿)에 모신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는 그 영험이 불가사의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반존자는 말법시대에 나타나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다. 1940년 희랑대를 중창할 무렵 본래 계획은 암반 위에 2칸 6평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목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두 칸은 너무 적으니 3칸으로 지어달라고 해 3칸으로 지었다는 것. 꿈에 나타난 노인이 바로 독성 나반존자라는 얘기다.
원만무애의 깨달음을 담은 희랑조사상!
해인사 들머리에 있는 성보박물관. 이 곳에 가면 다양한 불교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대장경 인경 체험도 가능하다. 박물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찾으면 나무로 만든 희랑조사상을 만날 수 있다. 1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조각상은 희랑 스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초상조각으로 초상기법이나 불상양식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유물이다.
희랑대에 얽힌 전설처럼 조사상을 보면 특이하게도 가슴 한가운데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다. 제자들의 수행을 위해 가슴에 구멍을 뚫어 피를 흘려 모기를 불러모았다는 희랑조사의 전설을 조각상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희랑조사가 직접 조각상을 만들면서 자신이 전생에 흉혈국(胸穴國) 사람임을 표시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는 전설도 있다. 흉혈국 사람들은 가슴에 있는 구멍을 통해 불법의 기운을 내쏘았다는 것이다.
희랑조사상을 보면 살아 있는 스님을 뵙는 듯 생생하다. 형형하면서도 온화한 눈빛, 광대뼈 튀어나온 볼, 오뚝한 코, 부드럽게 다문 입, 서로 포개진 앙상한 손 등 마음씨 넉넉한 노승의 풍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 철썩 같은 수도와 내공으로 다져진 의연함과 단호함도 느낄 수 있다. "차 한잔 들고 가지(喫茶去)."하며 길손을 맞을 것 같은 모습이다. 해인사의 이름이 유래된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온갖 번뇌가 끊어진 고요한 상태)'의 경지를 조각상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은은한 기품이 감도는 희랑조사상은 전통 조각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보물 999호로 지정돼 있다. 팔만대장경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해인사에서 가장 아끼는 조각 유산이다. 사람 앉은 키 높이인 82.7cm의 이 조사상은 나무로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초상조각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도 매우 크다. 나무 표면에 올이 고운 삼베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두껍게 채색을 했다. 비현실적으로도 느껴지는 불상 조각과 달리 인간미 넘치는 현실적 용모와 몸체를 그대로 살린 사실주의적 인물상이어서 더욱 정감이 간다.
세상이 어지러웠던 후삼국 시대와 고려 초기를 살았던 희랑조사. 앙상한 몸매와 세모진 턱, 눈꼬리와 이마의 주름 등에서 희랑조사가 겪었던 격동의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스님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산전수전 세파를 겪으며 지혜가 첩첩이 쌓인 때문인가. 스님의 입가엔 엷은 미소만 맴돌고 있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수행승의 은인자중하고 사려깊은 면모가 절로 느껴진다. 원만무애(圓滿無碍)의 깨달음을 희랑조사상은 박물관을 찾은 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장안사 기장 장안사 대웅전(機張 長安寺 大雄殿)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3
기장 장안사 대웅전(機張 長安寺 大雄殿)-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3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673)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쌍계사(雙溪寺)라고 했다가 애장왕(哀莊王, 800~809)이 다녀간 후에 장안사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38년(인조 16) 태의태사(太義大師)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1654년(효종 5)에 원정(元正), 효능(孝能), 충묵(沖?) 스님의 의해 중건되었다고 하며, 1948년에 다시 크게 중수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볼때 지금의 대웅전 모습은 1654년 중건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장안사는 주불전인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이 있고 명부전, 응진전과 나란히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으나, 요사채들은 약 30여년 전에 신축된 것이며 원래는 대웅전을 마주보고 강당이 배치되어 대웅전, 응진전, 명부전, 강당이 대웅전 앞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ㅁ자형 배치형식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각구성과 배치형식은 조선 중?후기에 통불교계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이른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양식인 장안사 대웅전에는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왼쪽에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모셔져 있고, 불상 뒤에는 1856년(철종 7)에 제작된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점은 창호(窓戶)의 구성으로, 격자살과 교살이라는 단 두가지 창살기법으로 중심성을 강조하는 입면구성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각 창호의 윗부분에는 격자살마다 한 칸 건너 원형의 꽃살을 장식하여 소목공예(小木工藝)의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은 위치하고 있는 지대가 높을 뿐 아니라, 건물 폭에 비해 건물 자체의 높이가 높고 처마가 깊게 돌출한 팔작지붕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평면의 규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을 주며, 공포 안의 부재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장식성을 더해주는 등 중심 건물로서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