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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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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회승당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천은사 회승당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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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승당(會僧堂)은 맞배지붕에 ‘ㄷ’자 모양의 건물로서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전면 마루 끝에는 범종이 있는데, 몸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1778년(정조2)에 봉안된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명문은 부조(浮彫)로 된 부분과 점각(點刻)으로 된 부분이 있으며 1778년에 해당되는 건륭 연호는 부조로 되어 있고 점각 부분에도 1880년(고종17)에 해당되는 연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1880년에 약간의 보수가 있었던 듯합니다. 명문으로는 그 밖에도 ‘풍진명(豊鎭溟)’ 및 ‘남원천은부원중종(南原泉隱府院中鐘)’등의 글이 있습니다. 종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그만 총알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25 때 이곳 지리산의 형편이 어떠했는 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설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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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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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천은사 설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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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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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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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고루 바로 다음 건물은 설선당입니다. 'ㄷ'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6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지실과 종무소 그리고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주 출입구를 중정쪽에 두지 않고 그 반대편에 두어 본전공간의 성스러움을 배려했고 아울러 개개 건물의 기능성도 최대로 살렸습니다. 구조는 막돌초석형 두리기둥을 세운 2익공양식이며 부분적으로 편리하게 툇마루를 설치하였습니다. 맞은 편에 있는 회승당과 함께 퇴색된 기둥 나무색과 아름다운 기와의 곡선으로 중정을 아늑하게 해 주어 찾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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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운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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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천은사 운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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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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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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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루 오른쪽으로 도량의 중정(中庭-한 가운데 정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오른쪽 축대 위에 운고루(雲鼓樓)가 있습니다. 보통 루(樓)형식으로 예불시에 치는 사물이 걸려 있으며 흔히 범종루(梵鐘樓) 또는 종고루라고도 합니다. 이 종각에는 예불이나 행사시에 치는 사물(법고·운판·목어·범종)이 있는데 조석 예불시에 연주하여 그 소리를 통해서 세상에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물(四物)

    목어(木魚)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하여 배부분을 파내고 안쪽의 양벽을 나무채로 두들겨 소리를 내는 법구이다. 소리로써 물속에 사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물고기의 모습에서 점차 머리 부분만 용의 모습으로 하여 용두어신(龍頭魚身)의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편 목어는 물고기가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처럼 수행에 힘쓰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범종(梵鐘)
    범종은 절에서 대중을 모으기 위해서나 때를 알리기 위해서 치는 큰 종으로, 흔히 종루를 짓고 달아두는데, 시대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즉 ‘범종’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사찰에서 쓰는 종이란 뜻으로, 청정한 불사에 사용하는 종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범종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구이다. 즉 범종의 소리는 우주의 모든 중생의 영혼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는 대자대비의 음성인 것이다. 한국범종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신라양식과 고려양식, 조선양식으로 약간씩의 양식변천을 이루었다. 신라종과 고려종의 양식은 순수한 우리 선조의 창의력에서 이루어진 형식인데 반하여 불교 배척시대였던 조선조 범종 양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한·중 혼합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시 신라종 형식이 한국종의 절대적인 양식으로 널리 유행하여 조성되고 있다.

    북(鼓)
    법고(法鼓)라고도 하며, 군사적 용도가 사찰로 유입되어 군중을 모으는 불구로 이용되었다.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듯 불법을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세간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여 세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이다. 법고의 소리에는 지상의 모든 축생을 제도하는 불법의 의미가 담겨있다. 또한 불법이 널리 세간에 전해지는 것을 북소리가 퍼지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교법이 중생의 번뇌망상 또는 집착과 오욕의 마군을 없애는 것이 마치 진을 치고 있던 군대들이 북소리가 울리면 전진하여 적군을 무찌르는데 비유하였다. 또한 선종사찰에서는 구조 법당의 동북쪽에 달아 놓고 주지의 상당(上堂)과 소침, 보설, 입실 등의 법요의식에 사용한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침, 저녁 예불 때와 법요식을 거행할 때에 법고를 친다.

    운판(雲版)
    청동이나 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법구로써 소리를 내어 허공에 날아다니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모양에 따라 화판 또는 장판이라고 불렀다. 선종사찰에서는 재당이나 부엌에 매달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릴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죽이나 밥을 끓일 때에 세 번 침으로 화판, 끼니 때에 길게 침으로 장판이라고도 한다.

  4.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보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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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천은사 보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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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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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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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문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 정면으로 2층으로 지어진 누각이 당당하게 서 있는 보제루의 모습이 보입니다. 보제루란 대중의 법요식(法要式) 집회소로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후면만 중이층으로 구성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입니다. 강당형식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형식으로 꾸몄습니다. 현판은 1934년 호남명필 이삼만(李三晩)이 썼습니다. 이 현판 글씨는 단아한 보제루와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설명] 보제루의 구조는 막돌초석위에 원통형(일부는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이며, 공포는 행공첨차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게한 2익공식이다. 공포 역시 연봉조각이 올려져 있는 등 화려하다.

  5.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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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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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천은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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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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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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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홍루를 지나면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그 끝에 정면 3칸, 옆면 2칸의 천왕문(天王門)이 서 있습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며 속세의 잡귀가 불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천왕문은 수행의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불가의 세계인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의 궁궐을 형상화하여 세워졌습니다. 천왕문 앞에는 사찰에 따라 금강문을 세우기도 합니다.
    천왕문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습니다. 사천왕은 33천중 요계 6천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의 지배자로서 수미의 4주를 수호하는 신으로 호세천이라 하며, 수미산 중턱 4층급을 주처로 하는 신이다.
    불가(佛家)에서 사천왕천은 욕계6천의 첫 번째 문이자 수미산 세계이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 이르면 좌우에 해와 달의 세계가 빛나고 그 위로는 수미산 정상부 도리 33천의 하늘이 펼쳐진다. 사천왕은 이러한 수미산의 4주에 위치하면서 각각이 세계르르 수호하고 있다.

    천은사 사천왕
    지국천왕은 건달바와 부단나 등의 신을 거느리고 동쪽 하늘을 수호하며, 광목천왕은 용과 비바사라는 신을 거느리고 서쪽 하늘을 수호하며, 증장천왕은 구반다와 폐려다라 불리우는 신을 거느리고 남쪽하늘을 수호하며, 다문천왕은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북쪽하늘을 계절적으로는 봄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광목천왕은 손에 용과 여의주 또는 견색을 들고서 인간의 노여움의 감정을 다스리고 여름을 주관하고 있다고 한다. 증장천왕은 손에 칼을 들고서 사랑의 감정을 관할하며 겨울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다문천왕은 손에 보탑이나 깃대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감정을 관할하며 겨울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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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소나무 숲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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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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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천은사 소나무 숲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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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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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수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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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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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천은사 수홍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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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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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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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을 지나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보통 피안교라 부르고 있습니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찰에 갈 때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금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만큼 불자들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보는 경건한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
    천은사에는 그 다리 위에 2층 누각인 수홍루가 있습니다. 수홍루는 정면 1칸, 측면 한칸인 2층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계곡과 어우러진 누각은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릅답습니다. 정면 현판의 글씨는 염제(念齊) 선생의 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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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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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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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천은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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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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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건물로 산사에 들어서면 맨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써 절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문이 일주문입니다. 이 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 하는데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적인 번민과 욕망을 벗어버리게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로서 건축적으로는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만을 올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 일심(一心)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주문의 지붕은 대개가 다포계의 맞배 지붕을 하고 있으며 보통 소속산문과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걸어 사찰의 소속과 격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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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천은사 매표소가 있는 산문을 지나 300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천은사의 넓은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 끝에 천은사 일주문이 있습니다. 천은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입니다. 천은사 일주문은 그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절경으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일주문에 걸려 있는 현판(90x114)은 <창건과 역사>에 언급했던 것처럼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가 마치 물 흐르듯 수기를 불어놓은 수체(水體) 글씨로 썼습니다.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서부터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았다는 신기한 얘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주문 아래에서 가만히 귀기울이면 현판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일주문 옆으로는 낮은 담장을 둘러 공간감을 절묘하게 살리고 있습니다.

  9.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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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천은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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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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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浮屠)는 부두(浮頭), 불도(佛圖), 포도(蒲圖)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기도 합니다. 어원적으로는 부처님을 뜻하는 인도의 옛말 붓다(Buddha)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탑을 뜻하는 스투파에서 나왔다고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부도라고 하면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의미합니다.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부터는 주검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장골(藏骨)이라는 불교식 장제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부도가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 스님들의 지위가 높아져 불탑처럼 스님의 부도도 많이 건립하게 되었습니다.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경과 불상 등 법신사리를 봉안한 불탑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에 건립하는 반면에 승탑인 부도는 사찰 주변의 호젓한 곳에 석비와 함께 조영되었습니다.
    부도는 불탑과 구분하여 단층의 건물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석등이 함께 조성되기도 하였습니다. 부도는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과 종형 또는 복발형의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불탑과 마찬가지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불탑보다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탑비(塔碑)는 고승의 부도에 부속되어 석조로 조영되는 것으로써 일반적으로 대왕의 석비나 묘비와 그 형태는 동일하나 불교의 유물인 까닭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탑비에는 고승의 일평생 행적이 건립 년월일과 함께 새겨 지고 있어, 그 비문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체는 금석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기도 한다. 탑비는 맨 밑에 구부(龜趺)가 조각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이 세워지며, 상부에는 용 머리가 구름과 함께 화려하게 조각 장식되어 집니다.
    천은사 부도전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향우)으로 약간 언덕인 산비탈에 석비(石碑) 2기와 함께 10여기 부도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속한 것들입니다. 부도가 조사를 숭배하고 이를 기리는 문손들의 공경심에서 우러나온 작업이라면 통일 신라시대 이후 계속하여 이어졌을 법도 한데 고려중기 이후 조선초기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과제로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범란당 부도
    연화문을 엷게 조식한 원형의 대좌에 상후하박인 고복형의 탑신을 얹어놓았다. 옥개석은 방형으로 상면에는 전후좌우 사방에 세줄의 기왓골형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보주를 표출하였다. 탑신 전면에는 「범난당영재탑(梵鸞堂英宰塔)」(자경 7cm)이라 음각명문하였고 뒷면에는 「불기이구오육년경향법려입(佛紀二九五六年京鄕法侶立)」(자경 3.7cm)이라 썼다.위 명문에 의하면 이 부도는 1929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총고 128cm, 대좌직경 4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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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당 부도
    이 부도는 천은사부도군(일주문옆)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천은사 부도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부도이다. 대좌는 원형인데 앙연이 조식되었으며 그 사이에 기둥을 세워 8면을 구분하였다. 탑신은 타원형인 고복형으로 하단에 예리한 꽃잎을 장식한 16엽연화문이 조각되었다. 역시 탑신 상단부에도 16엽연화문이 엷게 장식되었다. 탑신 전면에 「용담당(龍潭堂)」(자경 15cm)이라는 당호를 새겨놓았다. 상륜은 별석으로 하여 노반과 보륜·보주를 올려놓았다.(총고 170cm, 대좌직경 75cm)
    부도 바로 앞에는 이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다. 비석크기는 총고 93cm, 폭 377.7cm, 두께 10.4cm로 전면에 「용담대화상사리탑(龍潭大和尙舍利塔)」(자경 6.3cm)이라 명문하였으며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임우십월일입 합사 전영 도감진초 별좌포성 주지 책영 홍주 차준 환척(崇禎紀元後壬午十月日立 合寺 全營 都監震楚 別座抱性 住持 策英 洪主 此俊 幻倜)」라 음각하였다.
    위 연대는 석비가 중앙에 균열되어 확실치는 않으나 "삼(三)"자가 결락된 것으로 보이는데 위"삼(三)"자가 확실하다면 위 연대는 1762년(임우, 영조38)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같다. 왜냐하면 남원출신인 "용담당"의 입적연대가 1762년이기 때문이다. 용담은 조관스님(1700∼1762)의 법호(法號)로서 전라남도 남원출신이며 19세기 감노사(지금의 천은사)에서 삭발하고 영·호남의 명사들을 찾아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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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당 부도
    기단부에 중석이 없는 앙·복련이 장식되고 그위에 유곽이 없는 9개의 유듀만이 표출된 고복형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상륜은 앙련이 조식된 보주가 안치되어있다. 전면)에 「영해당정원지탑(影海堂正源之塔)」(자경 5cm)이라 명문하고 후면에는 「불기이오삼사년이월일(佛紀二五三四年二月日)」(자경 4cm)이라 썼다. 이 부도는 최근에 세운 것이다. (총고 1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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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印大부도
    비교적 잘다듬어진 8엽의 앙연을 조식한 원형의 대좌 위에 고복형의 탑신을 얹어놓았으며 그 위로는 4각형의 넓고 큰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옥개석 상면으로는 우동마루가 있고 그 사이에 기왓골이 조식되었다. 상륜부는 별석으로 하여 노반과 복발·보륜·보주를 장식하였다. 탑신에 당호의 명문이 마모되어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총고 170cm, 대좌직경 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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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대사(性堂大師) 부도
    비자연석을 약간 다음에 대좌로 삼고 그위에 별석으로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은 하후상박형의 석종형인데 하단에 두줄의 양각띠를 두르고 상단은 네군데에 유곽과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조식하였다. 탑신전면에「성당대사(性堂大師)」(자경 8cm)라 명문하고 조성연대는 기록하지 않았다.상륜부는 탑신과 일석으로 하여 노반과 보륜·보주를 안치하였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총고 1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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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서씨 부도
    천은사의 10여기 부도중 맨앞줄에 위치하고 있다. 지대석 없는 연화문을 조석한 앙연의 원형대좌에 반구형의 탑신을 앉히고 그 위로 방형의 옥개석이 연결되었다. 옥개석 상면은 각 모서리에 우동이 보이고 각4면으로는 팔작지붕형인 합각이 모각되었으며 정상에는 일석으로 하여 보주를 앉혔다.부도의 전면(前面)에는 「장성서씨사리탑」(자경 9cm)이라 쓰고 뒷면으로는 「씨칠십사가경이년정사치출사리무년이월자김추동입(氏七十四嘉慶二年丁巳齒出舍利戊年二月子金秋東立)」(자경 4cm)이라 음각하였다.위 내용에 의하면, 1797년(정조(正祖 21) 74세로 입면한 장성서씨의 치아사리를 그 다음해인 1798년(무오)에 그 아들 김추동이 세운 보도임을 알 수 있다.(총고 130cm, 대좌직경 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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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공처사 부도
    자연암반을 지대석으로 삼아 그 위로 원형의 대좌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대좌는 원형으로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탑신은 고복형인데 전면에 「현공처사박」(자경 4.5cm)이라 음각하였으나 밑부분이 판독불능이다. 후면에도 역시 장방형의 액면을 모각하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을 할 수 없다.옥개석은 8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상면에는 우동마루가 표출되었으며 전각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반전을 보였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으로 하였고 3단의 원형띠를 두르고 있다. 조성시기는 조선후기로 보인다.(총고 112cm, 대좌직경 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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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한불교조계종 천은사 천은사 창건과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천은사 창건과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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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절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낙 광대한 지리산자락이라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지금은 노고단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절앞까지 이어져 있고 화엄사까지 직통하는 도로가 놓여 있어 어렵지 않게 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독특하고 운치 가득한 수홍문을 건너 절을 찾는 즐거움은 아주 특별합니다. 지리산의 빼어난 산수와 풍광 그리고 그 속에서 불법의 진리를 만나는 것은 더 없는 보람일 것입니다.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피던 중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唐 僖宗 乾符二載 緣起相形而建設 德雲因勢而增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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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일제시대에 간행된 구례읍지에는 이 기록에서 창건주 연기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별호인데 이것을 유래로 잘못해석하여 도선국사 이후의 스님인 덕운을 창건주로 왜곡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도선국사가 창건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유학시 일행선사로 부터 3천8백 비보사찰을 중건 혹은 창건토록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신라 조정에 긴밀히 모의하여 신라 국토 곳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천은사도 바로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볼때 인근 화엄사의 창건연대(544년)와 비교해 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기 보다는 중창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밝혀진 바 없어 그 시기와 유래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절은 더욱 번성하여 충렬왕 때(1275~1308)에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지정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많은 수도자가 진리의 광명을 터득하는 수행처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후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10년(광해군2)의 일이다. 당시 절의 주지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로서의 명맥을 이끌어 나갔다. 뒤이어 1679년(숙종5)에도 단유선사(袒裕禪師)가 절을 크게 중수했는데, 이로부터 절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꾸었다.

    1715(숙종41)에는 팔상전에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고, 1749년(영조25)에는 칠성탱화를 조성하였다. 1774년(영조50) 5월에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혜암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은사 설화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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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