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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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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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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삼성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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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칠성 ‚ 독성 ‚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 의 수(壽) ‚ 복(福) ‚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현재의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의 부 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장대석으로 4단 쌓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는데 지붕은 팔작 형식 이다. 그리고 기단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공포는 익공 형식이지만 마치 다포 형식처럼 기둥 사이에 주간포를 1구씩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하다. 현재 내부에는 불단 중앙칸에 미륵 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벽에는 칠성 탱화를 모셨다. 왼쪽 칸에는 산신도를 ‚ 오른쪽 칸에는 독성 을 모시고 독성 탱화를 걸었다.
이 건물은 공포의 형태나 부재의 깎음 수법 등으로 보아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장식성에 치우쳐 법식 이 흐트러져가는 현상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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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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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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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범종각-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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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만세루 위쪽 석축단의 좌우에 있는 건물들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것이다. 범종각은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막돌로 만든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모서리는 원형 주좌를 가진 방형 초석을 사용하여 특이하다.
보장각은 부석사 고려각판(보물 제735호)과 조사당에서 떼어 낸 벽화(국보 제46호)를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정면 3칸 ‚ 측면 2칸의 건물 2동을 석축단 위아래에 따로 건립하여 서로 연결하였다.
소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인데 부석사도 예외는 아니다. 사찰 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起) 라면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인 승(承)에 해당되고 여기서 축이 꺽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轉)의 공간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가람의 건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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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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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가람의 건축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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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 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 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대목을비롯 한 많은 장인들의 체취가 베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 이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된 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가람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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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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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가람 논고-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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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1. 부석사 구조의 신앙적 배경은 정토신앙인가 ‚ 화엄사상인가?
부석사의 독특한 구성 방법을 해석하는 견해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의 체계에 의거하여 아미타 불을 주존으로 삼고 ‚ 삼배구품(三輩九品)의 교리에 따라 전체 영역을 9개의 단으로 구성했다는 설이고 ‚ ?두 번째는 화 엄경 입법계품의 십지론을 근거로 10개의 단으로 구성했다는 설이다.
다수의 불교학자 및 김봉렬 등이 첫 번째 설을 ‚ 이원교 · 배병선 등이 두 번째 설을 지지하고 있다. 정토신앙에 근거한 설은 부석사에 화엄 사상에 관계된 유물이 없고 ‚ 시기적으로도 화엄종이 체계를 잡기(9세기) 훨씬 전에 창건되었으므로 당시 일반화되었던 정토신앙을 근거로 삼았으리라는 시각이다. 석단도 회전문부터 무량수전까지 의 9개의 단을 회전문 터) – 범종각 – 안양루라는 결절점들에 의해 3 – 3 – 3의 구성으로 본다. 이것이 무량수경에서 말하 는 삼배구품설의 구조와 대응되며 ‚ 9품왕생의 최고 단계인 상품상생의 경우는 무량수전의 내부를 뜻한다. 내부에 들어가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아미타여래 를 만나게 되어 진정한 극락왕생의 염원을 이루게 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화엄사상에 입각한 설은 의상 조사가 직접 창건한 사찰로서 그가 펼쳤던 화엄 사상과 건축 공간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우선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 주 변의 산 이름 – 도솔산 ‚ 비로봉 ‚ 연화봉 – 에서 화엄경의 이상향을 이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부석사의 전체 가람 구조는 화엄경의 34품 ‚ 8회 ‚ 10지의 각 단계 에 따라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부석사의 주불전은 무량수전으로 독존의 아미타여래를 동향으로 모시고 탑을 세우지 않았다. 화엄경 맨 마지막 장에 는 화엄경의 주인공인 보현보살이 비로자나불과 함께 아미타여래를 찬양하고 극락 세계에 귀의할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의 극락세계를 관장 하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를 서쪽에 모셔 동향하도록 하였음은 철저히 교리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2. 부석사의 석단은 과연 몇 단인가?
이와 같이 정토신앙과 화엄사상 근거론의 쟁점은 부석사 전체를 이루고 있는 석단의 구성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현재의 천왕문부터 무량수전 기단까지의 석단의 수 는 보기에 따라 9단에서 12단까지 셈할 수 있다. 여기서 천왕문은 원래 일주문 터였던 것이 잘못 중건된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러므로 천왕문이 위치한 석단은 제 외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회전문 터 앞의 좁은 석단을 셈하느냐 일종의 계단참으로 보고 제외하느냐에 따라 9단이냐 10단이냐가 결정 된다.
3. 부석사의 진입 과정중 안양루 아래부분과 윗부분의 축이 꺽여져 극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천왕문 위부터 범종각까지의 축과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연결하는 축은 30도 정도 어긋나 있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 범종루 밑에서 볼 때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중첩되 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가 있어왔으나 논리적이지는 못하다. 최근 최종현씨(우리공간 연구소)가 건물마다 고유한 안대(案帶:바라보는 산 또는 봉우리)를 가진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 이원교 씨의 논문에서 이 학설이 뒷받침되고 있다. 즉 범종각 위에서 보는 안대는 도솔봉이며 무량수전의 안대는 동쪽 으로 돌출된 작은 봉우리로 ‚ 무량수전과 그 안산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미타정토를 상징하며 ‚ 나머지 축과 도솔봉과의 관계는 미륵정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4. 안양루 앞에는 대적광전이 있었다?
여기서 김봉렬 씨는 또다른 해석을 덧붙인다. 안양루 대석단 아래 ‚ 범종각과 직선상에 놓이는 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론이다. ⟨ 순흥읍지 ⟩ 에는 안양루 아래 법당이 있다고 했고 ‚ 겸재 정선의 ‘ 교남명승첩 ’ 에도 법당이 뚜렷이 그려져 있다고 하며 ‚ 법당 안에 놓이는 괘불대의 흔적도 남아있다. 그같 은 법당이 있었다면 부석사는 법당을 중심으로 삼는 아래절과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하는 위절의 두 영역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구조를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 산문을 거쳐 장대한 계단과 누각 밑을 지나 정점에 오르면 법당에 이르러 일단 멈춘 흐름이 다시 뒤쪽의 안양루로 유도되어 무량수전에 다다르게 되는 ‚ 두 번의 클라이막스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이 전체를 두 영역으로 해석해 보면 ‚ 전체 석단이 다시 두 개의 대석단으로 구분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평면적으로 굴절된 축과 함께 단면적으로 조성된 대석단이 아래 위 두 절을 입체적으로 중첩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한 구성은 하나의 효과를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형의 체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 교리적 내용도 상징화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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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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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보물 제220호)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 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자인당 석불좌상
자인당에 2구의 비로자나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 역시 부석사 동쪽의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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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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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3층 석탑-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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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보물 제249호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8매 석으로 짜였고중석 각 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 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5단이고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었다.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 있다.
본래 탑은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쪽에 서 있어 궁금중을 자아낸다. 아마도 동쪽 을 향해 안치된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방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삼층석탑은 부석사 창건 당시 조성된 것으로 높이가 5.26m ‚ 기단폭 이 3.56m 이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건실하고도 장쾌한 느낌이 든다.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 단 ‚ 몰아쉬는 숨을 들이키면 범종루가 눈앞에 들어온다. 이어 ‚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반기고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부석사 동쪽 일명사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석사의 경관을 흐트리지않고 잘 조화되어 있다. 탑은 지석대 위에 상 · 하층 기단을 쌓고 우주와 탱주를 각각 새겨 격식을 갖추고 있다. 또 ‚ 서탑에는 익 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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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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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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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부석사 석등-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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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 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景文王代(861~874)로서 ‚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 무대가 됨에 따라 ‚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 石龍 ‚ 長臺石 ‚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조사내용
석등의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지대석은 3매의 판석이 조립된 방형의 지대석으로 상면에는 하대하석을 받치기 위해 弧形의 받침대가 2단 각출되었고 ‚ 네 귀는 들림현상이 거의 없이 평이하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別石이다. 하대하석 상면에는 角形과 弧形의 2단 받침대가 마련되고 側斜面의 상하에는角帶 가 돌출되었다. 각대 내부에는 음각면의 안상이 2조씩 모두 8개가 새겨져 있다.
조사내용
석등의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 하지 못하였다. 지대석은 3매의 판석이 조립된 방형의 지대석으로 상면에는 하대하석을 받치기 위해 弧形의 받침대가 2단 각출되었고 ‚ 네 귀는 들림현상이 거의 없이 평이하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別石이다. 하대하석 상면에는 角形과 弧形의 2단 받침대가 마련되고 側斜面의 상하에는角帶가 돌출되었다. 각대 내부에는 음각면의 안상이 2조씩 모두 8개가 새겨져 있다.
하면은 3단의 받침대가 마련된 후 外緣의 연화문과 연결되고 상면은 2단의 받침대가 마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형받침이 다. 上臺帶는 50mm로 굵기가 두꺼워 화사석과 상대석의 경계가 뚜렷하며 그 상면은 중앙으로 갈수록 귀솟음이 되어있다. 팔면체의 화문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사면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 나머지 사면 외부에는 보살입상이 浮彫되었다. 火窓높이 410mm ‚ 너비 170mm로 외곽에는 1단의 윤곽대가 마련되고 윤곽대 내부에는 鐵釘孔이 12개씩 돌려있고 이 구멍은 한쪽에만 14개가 있으며 그 배열도 특이해 개폐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에는 가로 180mm ‚ 세로 150mm의 등화시설로 보이는 방형의 段이 한 단 파여 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 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三道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 늘어뜨린 천의를 잡 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는데 ‚ 자세들이 모두 자연스러우며 신체가 날씬하다. 이 보살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 어깨에 늘어뜨린 상태 고 하의는 군의를 입고 있다. 옥개석을 삿갓형태를 하고 팔각 옥개면은 仰曲과 안허리가 분명하며 처마선도 경쾌한 곡면을 나타내고 있다. 옥개 상면은 팔엽복 판연화 문의 蓮華冠이 덮혀 있고 ‚ 그 위로 호형과 각형의 층급 받침대가 2단 마련되었다. 상단 상륜받침대 동서측 중앙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홈이 파여 있기도 하다.
처마 안쪽에는 깊이 28mm, 너비 20mm 切水溝가 돌려지고 중앙에는 옥개받침대가 2단 각출되어 있다. 내부 상면은 상륜부를 낄수 있는 竿孔이 지름 220mm로 뚫려있고 구멍은 처마쪽으로 갈수록 점차 옥개면의 형태로 넓게 벌어져 있다. 상륜부는 원래 보주형의 연봉이 있었는데 현재는 보륜의 중간부까지만 남아 있다. 상륜은 하단부에 촉이 있어 옥개석에 끼워지게 되고 외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3단 받침이 있고 보륜 중앙허리에는 4엽의 만개한 연화문이 띠와 함께 돌려져있다. 이외에 석등과 동일한 시기와 양식으로 조성된 배례석이 석등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석등과의 거리는 800mm이고 안양루와의 거리는 2,250mm 떨어진 상태로 ‚ 그 형태는 장방형이며 1,420mm x 850mm x 300mm 크기이다. 배례석 상면 중앙은 子房이 큰 팔엽단판에 간엽이 있는 연화문이 양각으로 시원스레 장식되어 있다. 특히 넓은 자방 외곽에는 원형의 線帶가 돌려 있다. 四面에는 상 ‚ 하에 걸쳐 角帶가 한 단씩 각출되어 있고 사이에 안상이 낮으막하게 파여 있는데 앞뒤에는 4개의 안상이 ‚ 좌우 측면에는 2개의 안상이 각각 장식되어 있다. 이들 안상 아랫면은 하단부에 마련딘 받침대와 바로 연결되는데 받침대는 3단이 넓게 마련되어 안정감 있다. 이 석등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가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하석위에 팔각의 복엽 복련대석이 놓여 이루어진 점과 연화대 첨단부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 점 ‚ 그리고 화사석 사면에 보살이 장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즉 종래이 방형의 기단형태에서 팔각형태로 바뀌어 가는 변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기단부 하대석의 연화대 받침대가 원형에서 팔각으로 ‚ 그 상면은 간주받침대가 굽형으로 각출된 점 등 양식의 세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간주석을 받치게 되는 연화대석 상면의 角形과 弧形의 4단의 받침은 형태가 장식적인 층단이 마련되므로 ‚ 연화대석 의 높이는 그 폭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다.
상대 앙련이 연판 내에는 花紋이 있고 상대석의 두께도 하대석의 연화대석처럼 얇은 편이며 ‚ 이들 상 ‚ 하대석의 間葉은 2단의 重瓣 구조를 하고 있다. 화사석의 4개의 화창이 개설된 벽면 四壁에 사천왕상 대신 보살입상이 장식된 것은 매우 특징적이며 ‚ 옥개석은 옥개마루 쪽이 갑자기 들려 안허리곡이 심해 날카로운 감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연화문의 간엽이 중판인 점 ‚ 기단부에 귀꽃과 간주석 받침대의 발생 ‚ 그리고 상대 연화문 내의 보상화문이 화사석의 보살상의 장식 등과 같은 세부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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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석축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0
부석사 석축-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0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호국의 기원으로 서라벌을 향한 것이라는 설이 재미있다. 부석사에 한 번쯤 다녀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축과 돌계단을 특별히 기억한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다. 즉 ‚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 범종루 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데 ‚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쌓았다 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 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당간지주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0
부석사 당간지주-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0
보물 제255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 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 턱에 우뚝서 있으며 ‚ 그 키가 4.8m 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부석사 부석사 원융 국사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0
부석사 원융 국사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6-10
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
원융국사(圓融國師)는 964년에 태어났으며 속명은 김결응 ‚ 자는 혜일이다. 열두살 되던해 출가해 불법을 수행 했고 높은 덕 망으로 여러 왕들로부터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고려 문종때 국사(國師)가 되어 부석사에 있다가 1053년에 입적 했다. 비신은 높이1.73m이며 ‚ 재료는수성암질청석(水成岩 質靑石)으로 이루어졌다. 비문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으나 대체로 온전하며 상세한 내용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에 수록되어있다. 비신을 받치는 귀부(龜趺)는 휼륭한 각법을 보여준다.
귀부 지대석에는 안상(眼象)과 꽃무늬를 새겨넣었고 ‚ 머리는 용두화(龍頭化)했으며 귀갑(龜甲)은 6각형으로 선명하게 새기 고 왕자(王字)를 음각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이 비는 부석사에서 제일 먼저 해맞이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