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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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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388호
    지정일 : 1963.09.02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시대 : 조선시대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1328)때 지공(指空)이 창건하여 조선 순조 때인 1800년대에 폐사된 사찰이다. 조선 전기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서 태조 이성계가 늙은 후에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터의 북쪽 능선 위에 지공, 나옹의 승탑과 함께 서있는 이 부도는 무학대사의 묘탑이다.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부도의 형태는 구름무늬를 조각한 8각의 바닥돌 위에 받침부분인 기단이 놓이고 탑신과 머리장식부분이 포개져 있는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이 부도는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도 가지런하다. 무학대사묘비의 기록으로 미루어 1407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2.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앞 쌍사자석등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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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389호
    지정일 : 1963.09.02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 회암사
    시대 : 조선시대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3.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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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정일 : 1974.09.26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시대 : 고려시대

    회암사에 놓여 있는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다. 회암사에 서 있는 이 부도는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많이 사용된 양식으로,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3단으로 올렸는데 그 중 가운데받침돌만 배가 볼록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탑신은 둥근 공모양이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이 두툼하며 처마의 각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머리장식들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석등은 모든 부재가 4각으로, 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에 등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은 앞뒷면 2곳에만 창을 내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운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4.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무학대사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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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무학대사 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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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지정일 : 1974.09.26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8-1
    시대 : 조선시대

    회암사터에 세워져 있는 무학대사의 묘비로, 바로 뒷편에는 그의 묘탑(보물 제388호)이 함께 서 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조선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이고,무학은 그의 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그의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그 후 회암사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이라는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높직한 4각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결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떠 받들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를 향하고 있다. 비문에는 대사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특히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를 만나 그들의 제자가 된 일, 한양천도에 큰 역할을 한 일, 회암사에 두 스승의 묘탑을 세운 일 등이 잘 나타나 있다.

    태종 10년(1410)에 왕명을 받들어, 변계량이 비문을 짓고 공부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겨두었다 하나, 순조 21년1821)에 파괴되었고, 순조 28년(1828)에 다시 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5.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지 부도탑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지 부도탑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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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암사지 부도탑
    종목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지정일 : 1974.09.26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1
    시대 :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회암사터의 가장 북쪽에 서 있는 이 부도는 그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우 스님이나, 회엄사 중창에 힘쓴 처안의 부도탑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상·중·하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에 휩싸인 말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고, 윗받침돌은 8부신장과 덩굴무늬로 장식한 후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윗받침돌과 둥근 탑신의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로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여러 머리장식들이 포개져 있다.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작품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화려함이 느껴져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6.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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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자료 제135호

    비의 총높이는 365cm로 네모꼴 받침돌 위에 홈을 파서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식입니다.
    원래 1387년에 세웠던 것이 도중에 파괴되어 1828년에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비 옆에는 비신을 올려놓는 흠이 없는 거북받침돌인 귀부(龜趺)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7.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지 당간지주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지 당간지주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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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목 : 향토유적 제13호
    소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1
    시대 : 조선시대

    회암사지의 첫 번째 석축 모서리의 동쪽에 한 쌍,서쪽에 외짝 당간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모두 넘어져 묻혀 있던 것을 1981년 9월 복원하였는데 정확한 원래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서쪽 당간지주는 높이 325cm, 가로 52cm, 세로 58cm이며, 동쪽의 외짝 당간지주는 높이 325cm, 가로 61cm, 세로 55cm이다. 모두 황갈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정두부는 사분원을 그리지 않고 수평으로 처리되었으며, 외측면도 볼록하지 않고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당간을 가운데 세울 때 필요한 간공이나 간구가 내측면의 중앙부 및 정상부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이나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서리 처리는 내측면의 양쪽만 모죽임을 하였다. 당간좌는 보이지 않는다.

    당간지주가 있는 석축의 동쪽 15m 지점에는 높이 147cm,상면의 가로122cm, 세로 110cm, 두께 118cm, 하면의 가로 132cm, 세로 128cm, 두께 136cm의 당간지주석이 있다. 밑변이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진 사다리꼴의 지주석이며, ㄷ자형의 일석으로 안쪽이 비어 있어 깃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로 절의 입구에 괘불을 걸기 위한 시설로 생각된다. 이런 형태의 당간지주가 망월사에도 남아 있는데 모든 모서리는 모죽임을 하였고 양쪽으로 관통된 지름13~14cm의 둥근 간공이 위 아래에 있다.

    지주는 각 면에 아무런 장식없이 정연한 치석수법을 보이고 있는데 상단부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게 처리하였고, 지주 외면 외곽모서리는 6~7cm정도로 모를 깎았다. 지주 정상부도 평평하게 수평으로 다듬어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및 양주시청

  8.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지공선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지공선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서천국제납박타존자지공대화상(西天國提納薄陀尊者指空大和尙)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제납박타(提納薄陀:禪賢)이다. 가섭(迦葉)으로부터 108세라고 한다. 인도의 동북지방 갠지즈강 유역에 위치했던 마가다국 만왕(滿王)의 왕자로 태어나 8세 때 중동부 인도에 위치한 나란다사 율현(律賢)에서 출가하였다. 19세때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의 보명(普明)에게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인도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고려에서는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으며 이때의 기록은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조선전기의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오랜 기간이 아니지만 고려 불교계에서의 그의 족적은 상당하다. 그는 1326년 3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였고, 금강산에서 법기보살도량(法紀菩薩道場)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원 황실을 위한 불교의식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유력한 뒤 개경 동쪽의 숭수사(崇壽寺)에 주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었다. 1327년 10월에는 경원(慶原)을 저쳐 화산(華山)을 다녀 왔고, 이듬해 2월 통도사를 유력하였으며, 7월에는 연복정(演福亭)에서 계율을 설법했다.

    이밖에 영산현(靈山縣)ㆍ장단현(長湍縣) 등 여러 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옹에게 천축(天竺)의 나란다사와 그 지세가 같다고 말하여 회암사의 중창동기를 제시하고 있음은 회암사도 그가 유력한 곳임을 의미한다. 회암사는 그가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던 사원이었고, 대표적 계승자인 나옹이 중창하고 그의 석비와 부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전기에 가장 큰 사원으로 그의 법통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면서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화장사에는 그의 소상(塑像)뿐 아니라 유물이 밀집되었고, 묘향산의 안심사에도 그의 부도가 있다. 회암사에 남북으로 반대방향으로 임진강과 한강의 중부지역에 각각 자리잡은 화장사와 신륵사는 그의 기념사원이거나 문도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원나라에 돌아가서는 대부대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부인인 고려인 김씨가 세운 법원사에 머물렀다가 귀화방장(歸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1367년 보암장노(普菴長老)에 의해 그의 입적이 고려에 알려졌고, 1370년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고려에 오자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1327년(공민왕 21) 왕명으로 회암사에 사리탑을 세웠는데, 이색이 지은「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이『목은집』에 전한다.

    나옹ㆍ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ㆍ무학 자초(無學 自初)ㆍ대지국사 지천(大智國師 智泉)등이 대표적인 그의 문도이다. 나옹은 왕사(王師)로 책종되었고, 나옹의 문도인 환암 혼수와 무학 자초는 조선개국을 전후하여 가장 영향력이쓴 고승이었다.

  9.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나옹선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나옹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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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고려국공민왕사나옹대화상(高麗國恭愍王師懶翁大和尙) (1320-1376)

    영해 출신으로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이며,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껴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了然)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또 1344년에는 수도하며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이곳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려 석옹(石翁)에게 이를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1350년(충정왕 2) 평강의 휴휴암ㆍ자선사를 유력하였고, 이듬해 명주 모타낙가산에서의 관음보살 친견, 육왕사에서의 석가모니 예배, 승려 무상(無相)ㆍ고목영(枯木榮)과의 법론 토론, 1352년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 방문 등 수도에 정진하였다.

    원의 순제(順帝)에 의해 연경 광제선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개당(開堂)법회를 열고 금란가사를 하사받았으나 주지의 소임을 내놓고 다시 지공을 찾아 보고 1358년(공민왕 8)에 귀국하였다.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했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을 역임하고 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1371년에는 왕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받고'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이후 잠시 송광사에 머물다가 다시 회암사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철저한 불이(不二)사상의 토대에서 선(禪)을 이해했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기본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하여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해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했다.

  10. 대한불교조계종 회암사 회암사 무학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회암사 무학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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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23

    조선국태조왕사무학대화상(朝鮮國太祖王師無學大和尙) (1327-1405)


    삼기(三岐:합천군 삼가면)출신으로 속성은 박씨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5) 소지(小止)에게 출가하였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에 머물다가 1346년(충목왕 2)『능엄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진주 길상사ㆍ묘향산 금강굴 등을 유력하고, 1353년(공민왕 2) 연경으로 가서 지공에게 배웠으며, 이듬해 법천사에서 나옹을 처음 만난 후 무령 오대산ㆍ서산 영암사 등으로 나옹을 찾아가 수도하였다. 1356년 귀국하였으나, 나옹 또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무르자 1359년(공민왕 8) 다시 찾아가 나옹이 전하는 불자(佛子)를 받았고, 1371년(공민왕 20)에는 송광사에서 나옹에게 의발(衣鉢)을 받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난 후 나옹이 그를 수좌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였고,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유력하며 자취를 감추고 왕사로 삼고자 하는 공양왕의 뜻을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사에 책봉되었고,'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拂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받았으며, 태조의 명에 따라 회암사에 머물렀다. 1393년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는 수탑(壽塔)을 세우고, 이듬해 용문사로 들어갔다가 1402년(태종 2) 다시 회암사에 잠시 머물다가 금강산 진불암을 거쳐 1405년 금강암에 거처하다가 입적하였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거나, 한양 천도와 관련한 풍수설화 등에서 조선 태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직후에는 태조에게 유교와 불교의 작용이 다르지 않음과 백성의 어버이로서의 태도를 설법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