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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풀애마을 금풀애마을 부대시설
- 작성일
- 2024-08-10
금풀애마을 부대시설- 작성일
- 2024-08-10
원일전리 금풀애마을 체험 단지 내에는 숙박시설 외에도 다양한 이용 시설이 마련되어, 물놀이, 스포츠 활동, 야외 수련 등을 즐겨보실 수 있습니다.
잔디운동장 & 족구장
원일전리 금풀애마을 체험 단지 내 숙박시설 바로 앞에 잔디운동장과 족구장이 있습니다. 축구, 족구, 베디민턴,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 및 야외 활동을 하실 수 있습니다.
※ 유료 이용 시설로, 사전 이용 문의 및 예약을 하셔야 사용 가능하십니다.
※ 운동장 시설은 숙박요금과 별도 요금을 내셔야 합니다.
체험관 앞 물놀이계곡
체험시설 바로 앞에는 계곡이 흘러 여름 물놀이와 천렵을 하기 좋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수심이 얕은 물놀이 시설도 별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야외 캠프화이어장
계곡 바로 옆에 야외 캠프화이어장이 있어, 단체 수련 및 캠프화이어 활동을 하실 수 있습니다.
※ 사전 이용문의 및 신청을 해주셔야 이용 가능하십니다.
야외 공연장
야외공연장이 있어, 단체 수련 및 단체공연을 하실 수 있습니다.
※ 사전 이용문의 및 신청을 해주셔야 이용 가능하십니다.
정자
숙박시설 앞에 정자가 있어 여름밤 이곳에 앉아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 드시며 도란 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촌마을의 별빛도 감상해 보세요.
등나무쉼터
등나무 쉼터에서 산골마을의 정취를 느껴보시기바랍니다.
운동시설
아침, 저녁 식사 후 잠시 몸풀이 운동 어떠세요. 간단한 운동시설들이 있으니 이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놀이시설
가족단위 혹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어린이 손님들을 위해 놀이시설도 준비했습니다. -
샘재골송이마을 샘재골송이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10
샘재골송이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10
상광정리 역사
고대(古代)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광정진을 설치
상광정리(上光丁里)는 현북면 중심지며 면사무소와 보통학교가 이곳에 설치되었으며 최초에는 광정진(廣丁鎭)이였던 것이 인구의 증가로 상·중·하리로분할하여 상중하 광정리(光丁里)로 개칭되었습니다.
광정진(廣丁鎭)의 유래는 지금의 중광정리와 본동 경계지인 잣골뒷산 능선에 고대(古代)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광정진을 설치하였으므로 광정진이였습니다. 지금도 진(鎭)의 성지(城址)석축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명지리에서 흐르는 하수와 대치리에서 흐르는 하천이 이곳에 합류하여 광정천을 이루고 있습니다. [양양문화원 자료 제공]
상광정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한자로는 천치산, 우리말로는 샘재산이라고 합니다. 앞에 있는 산이 800 고진데 샘젯산인데, 왜 샘젯산이라 부르냐면 전에 꼭대기에 샘이 나서 그러는데 지도엔 천치산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산엔 전설이 있는데 샘젯산에서 약 4km 꺾어진 곳에 가면 여운포가 있는데 거기서 3km 정도에 용네미란 곳이 있는데 전에 큰 연못이 있었다고합니다. 그 연못에서 용마가 나와서 그곳을 넘어 다녔다고 해서 용네미라고 합니다. 왜 넘어다녔냐면 옛날에 장사가 있으면 반드시 용마가 따른다고 했는데 장사가 나와도 용마는 나오지 않았다고합니다.
용마를 기다리다가 목이 타 물을 마시면서 왼팔을 돌에 놓고 무릎을 끓고 앉았는데 그 자리에 그 자국이 남았다고 합니다.
바위가 있었는데 전엔 그 바위를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산에서 굴려서 지금은 그 바위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용마가 나오지 않아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못하고 그 장수를 기다리면서 연못을 넘어 다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 용마가 용네미를 넘어 다니다가 장수가 없으니까 도망쳤고. 용네미에서 한 1km 정도 가면 용골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 마을 사람들이 용마를 잡기 위해 고리를 만들어 거기다 놓았다고 해서 용고리(용골)이라 합니다. 그 후 용도 행방을 알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못에도 누룩바위란 곳에 그곳에서 장수와 용마가 만나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연안 김씨 정려문(延安金氏 旌閭門)
연안 김씨는 조선 순조 15년(1815) 4월15일 세종조 형조판서를 지낸 문 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후손인 김총수(金總壽)의 딸로 출생하여 출가 후 예의 범절에 어긋남이 없이 말을 삼가고 행동을 단정히 하여 효부의 칭송을 받던 중 남편 오씨가 인후병으로 병석에 눕게되자 백방으로 영약을 구해다 먹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김씨는 황급히 단지 주혈(注血)하여 잠시 회생케 하였으나 김씨의 애쓴 보람도 없이 남편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눈 속에서 남편의 상(喪)을 당한 김씨는 예(禮)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청상수절(靑孀守節)할 것을 결심하고 시부모님에게 효성을 다하다가 62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끝마쳤다.
이 사실이 고종임금에게 주달(奏達)되어 고종임금으로부터 광무 10년 6월 20일 열녀정문(烈女旌門)을 하사받게 된 것이며,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이라는 책을 만들어 이를 등재(登載)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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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리앵두마을 명지리앵두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10
명지리앵두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10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 앵두마을 밭농사와 논농사를 주로하는 농촌지역입니다. 옛날 마을 가운데 큰 연못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은데도 노는 물고기를 헤아릴수 있을 만큼 물이 맑았다 하여 명지리라 칭하였다고 합니다. 광정천을 중심으로 골짜기마다 자연마을이 20여개 정도 형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 마다 주민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겨운 지명과 유래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골 : 옛절터가 있어서 절골이라고 합니다.
도둑골 : 절골 윗골 이름입니다.
옹기점말 : 옹기를 굽던 곳을 옹기점말이라고 하며, 보쿠골의 북쪽마을 이름입니다
보쿠골 : 옹기점말 남쪽 입구골이 보쿠골 입니다. 이 곳에 15m 정도의 높은 암벽에 고을물이 떨어지는 폭포가 있습니다. 보쿠는 폭포를 말합니다.
품우골 : 지소 남쪽골 이름입니다. 이 골 안쪽에 금계포란지형 묘가 있어서 명칭하는데 품우골이라고도 합니다.
안골 : 동 중간 마을에서 서북쪽 장리쪽으로 가는 골이름입니다.
소매골 : 안골 서쪽골로서 명질에서 이 골에 초원(草原)이 제일 좋아 소를 방목하였다하여 이름하였습니다.
동짱골 : 이 부근에 양양 임천 노씨가문의 석장군이 있었는데 죽은 후 이 곳에다 묘를 썼다는데서 동짱골이라 합니다.
물맞이골 : 강릉김씨 논골 맞은편의 골 안벽상에서 떨어지는 물에 삼복더위에 물을 맞는 곳이 있어 물맞이골이라 합니다.
납다골 : 어성전리로 가는 서낭당 밑 남뽁의 골이름입니다. 어성전리로 넘어가는 길목이 낮다하여 이 골을 납다골이라 부릅니다. 예전에 토호가 살면서 이 부근 농민들에게 곡식을 거두어 드렸다는 연유로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서낭댕이 : 명지리와 어성전리 경계가 되는 산 허리에 숭산관행 으로서 돌을 갖다 놓고 기도하고 지나가는 곳인데 이 곳을 서낭댕이라 합니다. 성황당을 서낭댕이라 합니다. -
설악산오색마을 설악산오색마을 안내도
- 작성일
- 2024-08-10
설악산오색마을 안내도- 작성일
- 202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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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고을 수동고을 체험 프로그램
- 작성일
- 2024-08-10
수동고을 체험 프로그램- 작성일
- 202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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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마을 자두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10
자두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10
공수전리 유래
공수전리라는 마을의 이름은 조선조때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관가에서 정해놓고 경작하던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연유로 유래 되었다고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에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200여년전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마을의 형국이 귀인공자처럼 생겼다하여 마을명칭이 꼭 알맞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마을 지명 유래
북골 : 마을 북쪽에 있으며 골이 깊고 암자터가 있다 함.
부엉더랭이 : 북골 안에 있는 골이며 암석이 많고 폭포가 있으며 부엉새가 서식하였다하여 생긴 지명.
곤봉산 : 마을 서북간 산임.
위연미기골 : 송천천과 공수전천의 합강(合江) 건너편 골이름.
삿갓봉 : 수리와의 경계봉으로, 마을 동남간에 있음.
쇠죽재 : 옛날 우차(牛車)꾼들이 쉬면서 소죽을 먹이던 곳으로 마을 서남간에 있음.
마을 소나무 쌍솔과 전설
우리마을 용소골(3반)에 500년이나 된 노송(강원도 지정 보호수)이 한그루 있는데 보기에 매우 아름답고, 또한 곧게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그 모양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영험한 형상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제를 지내며 형제 가족간의 우애나 풍년을 기원하거나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제를 지내 왔다. 옛날 이 소나무가 있는 용소골에 농사를 짓는 엄씨댁에 아주 우애가 좋은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비가 몹시 내리던 날 강 건너에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형제가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늘 형제의 다정한 모습과 애틋한 사연을 바라보던 소나무가 두 갈래로 자라게 되자 이를 보는 이들은 그 때부터 형제의 넋이 깃 든 것이라 여기게 되어 쌍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황당과 마을대제(성황제)
공수전리에서는 매년 성황당에서 마을대제를 지내며, 성황당은 마을이 내래다 보이는 숲속에 있으며, 매년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을대제(성황제)를 이 곳 성황당에서 치르고 있다.
대보름행사
음력 1월 보름을 전후하여 대보름 행사가 열린다. 액운을 막아내고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보름행사는 마을 주민 모두가 나와 함께 흥겨운 전통놀이를 함께 즐긴다. 공수전리 마을 주민들은 달집 태우기농악, 그네뛰기, 쥐불놀이 등을 통해 주민간 화합과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범정사
공수전리에 위치한 범정사는 불교사찰로 전통 불교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공수전리의 문화유적 중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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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래마을 치래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10
치래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10
구룡령(九龍嶺) 아래 첫 마을인 갈천리는 예전 생활이 궁핍할 때 춘궁기에 갈근(葛根)으로 근근히 연명 하였는데 마을앞 계곡이 갈분(葛粉)일색이었다라고 하는데서 마을명칭이 유래하였다. 마을에서 2㎞ 가량 걸어 올라가면 철분·불소 성분이 많아 위장병·충치예방에 좋다고 알려진 갈천약수가 유명하다
세대수 : 63세대
인구수 : 145명
주업 : 농업 (41농가)
특징 : 산촌관광휴양마을로 민박, 펜션, 향토음식점 등으로 농외 소득 및 관광 소득 증대
치래
아홉마리의 용이 지나간 것 처럼 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하다는 구룡령 아래 첫 동네인 갈천(葛川)은 칡이 많아서 비롯된 마을이름으로 치래마을은 갈천을 우리나라 말로 풀어 쓴 명칭으로 어느마을 보다 산나물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갈천리
구룡령(九龍嶺) 아래 첫 마을인 갈천리는 예전 생활이 궁핍할 때 춘궁기에 갈근(葛根)으로 근근히 연명 하였는데 마을앞 계곡이 갈분(葛粉)일색이었다라고 하는데서 마을명칭이 유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2㎞ 가량 걸어 올라가면 철분·불소 성분이 많아 위장병·충치예방에 좋다고 알려진 갈천약수가 유명합니다.
구룡령
홍천-양양간 경계에 있는 아흔아홉구비로서 용이 지나간 자리처럼 구불구불하다하여 구룡령이라 이름 붙여짐.
정원대보름행사
치래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마을의 화합과 발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행사를 개최합니다. 대보름 민속놀이로는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농악놀이 등이 펼쳐집니다. 특히 마을 지명유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정월대보름 행사 중에 칡국수 만들어 먹기 체험도 함께 열립니다.
성황제
매년 음력 9월 마을 성황당에서 열리는 치래마을 성황제. 대한민국 천지간의 신령한 기운 백두대간 구룡령을 타고 내려와 강원도 서면 갈천리에 이르니 갈천마을의 선량한 모든 사람의 안녕과 지역문화 발전을 기원하는 갈천리 성황제. 성황제가 열리는 갈천리 성황당은 지난 2008년 9월 새로 축조하여 전통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옥향판소리연구소
갈천리에는 정옥향판소리연구소를 세워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는 정옥향 명창이 있습니다. “문화는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야 그 멋과 정취가 깊어진다”며 전통예술이 지역주민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
해담마을 해담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10
해담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10
지명유래
해담마을 이전 명칭은 서림리이다. 서림리는양양군서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림이 울창아혀 서림리라고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서림사가 있었던 연유로 서림골 또는 서림이라 하다가 1916년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서림리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림사터가있고, 해방전만 해도 180여 세대에 5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마을로 당시에는 5일장도 열렸던 전통의 마을이다.
현서분교
일제당시 서림리에는 갈잎학교라고 2년제 학교가 있었으나병자년 수해(1936년)에 떠내려가 2년후에 4년제인 현서공립학교가 들어섰다. 지금으로부터 7-여년전에 학교가 들어섰다. 현서국민학교는 최근에 학생수가 많이 줄어 상평초교 현서분교가 되었지만 마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교정에 오래된 벚나무가 드리워져 봄이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
황룡마을 황룡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10
황룡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10
황이리는 40가구 12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서울로부터 278km, 양양군청 소재지로부터 20km, 서면사무소로부터 16km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구룡령 방향 국도 56선이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며, 법정리인 서림리 일부와 미천리를 합하여 황이리란 행정리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미천리는 미천골이라 칭하고, 보물 제444호-보물447호가 있는 선림원지가 있으며, 절이 있을 당시 스님들의 공양을 지으려 쌀을 씻은 물이 20km 양양 남대천 하류까지 흘렀다하여 쌀미(米)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칭하였다 합니다.황이리는 마을 가운데로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 싼 지형이 마치 귀 달린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황이리라 칭하였다 하고, 2007년 1월 13일 마을 연시총회에서 주민 만장일치로 ‘황룡마을’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황룡마을은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 황이리에서 유래
양양군 서면 황이리 "황룡마을"은 백두대간 구룡령 산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다가 가파른 계곡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 습니다. 마을 가운데로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지형이 마취 귀 달린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 부터 황이리라 불렸다고 합니다.
미천골과 선림원지가 있는 역사의 고장
황룡마을의 미천골은 3층 석탑(보물 제 444호), 석등(보물 제 445호)등이 있는 선림원지가 있으며, 절이 있을 당시 스님들의 공양을 지으려 쌀을 씻은 물이 20km 양양 남대천 하류까지 흘렀다 하여 쌀미(米)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칭하는 등 역사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인심 넉넉한 전형적인 산촌마을, 얼음굴, 불바라기등 자연 속 휴양시설
중복때까지 얼음이 있는 얼음굴, 불바다처럼 빨갛게 물들어 붙여진 불바라기약수, 백두대간을 접하며 가을 단풍에 빠져드는 문닫이암산, 스님들의 교육장이라 불리던 선림원지 등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사계절 계곡과 숲을 벗하여 자연 속 휴양을 즐기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휴양마을이기도 합니다.
황룡마을의 전통한옥 숙박시설 및 체험관
황토와 기와의 멋스러운이 살아있는 황룡마을체험관,단체숙박및 세미나실을 갖춘 산촌휴양 체험관,피톤치드 체험관등 다양한 숙박,체험시설을 갗추고 있어 편안한 휴식을 하기 좋습니다.
마을의 위치 및 역사
황이리는 40가구 12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서울로부터 278km, 양양군청 소재지로부터 20km, 서면사무소로부터 16km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구룡령 방향 국도 56선이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며, 법정리인 서림리 일부와 미천리를 합하여 황이리란 행정리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미천리는 미천골이라 칭하고, 보물 제444호-보물447호가 있는 선림원지가 있으며, 절이 있을 당시 스님들의 공양을 지으려 쌀을 씻은 물이 20km 양양 남대천 하류까지 흘렀다하여 쌀미(米)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칭하였다 합니다.황이리는 마을 가운데로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 싼 지형이 마치 귀 달린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황이리라 칭하였다 하고, 2007년 1월 13일 마을 연시총회에서 주민 만장일치로 ‘황룡마을’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마을의 자연경관과 환경
전형적인 농·산촌마을로서 중복 때까지 얼음이 있는 얼음굴, 불바다처럼 빨갛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진 불바라기 약수, 백두대간을 접하며 가을 단풍에 빠져드는 문닫이 암산, 스님들의 교육장이라 불리던 선림원지가 있습니다.
자연그대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불바라기폭포, 상직폭포, 샘실폭포, 골짜기 하나가 폭포인 폭포골, 조봉, 매봉, 암산,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임도, 미천골 공예촌 등 마을의 자연경관은 그야말로 황룡의 휴식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 전체를 둘러싼 산림에는 송이버섯, 헛개나무, 산청목, 산나물, 엄나무, 피나무,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등 토종벌의 밀원지로서 농가 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산촌 지역의 민박농가는 수려한 경관과 함께 소박하고 농촌다운 정겨움이 있어 도시민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식처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미천골에는 국립 자연휴양림이 있어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이 4계절 내내 방문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 보물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가 고려 말에 폐사된 대규모 절터로서 3층 석탑(보물 제444호),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 부도(보물 제447호) 등이 1966년 9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서림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3층 석탑 등이 1996년 9월 30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에 복원 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44호 선림원지 3층 석탑 / 보물 제445호 선림원지 석등 / 강원도 문화재자료 2ㅔ1220호 서림사지 3층 석탑 -
산속호수마을 산속호수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09
산속호수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09
인구수(가구수) : 195명 (61가구)
마을의 주요면적 : 대지 :7.8ha(0.25%),농지104ha(3.3%),산림3.095ha(96%)
본래 간동면 지역으로 화천읍 동쪽지역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리 태산리 일부를 통합하여 간동면 동촌이라 하였다가 1937년 화천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간동면과의 교통이 불편해짐에 따라 화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태산리 전체가 동촌리에 통합되었다. 1964년 간동면 구만리에 화천면 동촌출장소와 간동면 구만출장소를 설치하여 유지해오다가 1981년 동촌 출장소가 폐지되었으며,1979년 5월 1일자로 동촌리가 1,2리로 분리되었다. 현재 동촌1리 주민들은 풍산리 흠사리의 호음고개로 이어지는 육상통로를 이용하고 있으나 동촌2리는 평화의 댐에서 진입하는 육로가 끊겨 대부분 선박을 이용하고 왕래하고 있다. 동촌리의 옛 이름은 관부리라하였고,건천공,골안,곱쟁이(여울),달래버덩등 마을 옛 이름들이 있으며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 있다.
호식총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영혼을"창귀"라고 한다.
"청우기담(聽雨記談)"이라는 책에 "창귀는 호식당한 사람의 영혼으로,감히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창귀에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박지원의 '호질'에는 '굴각(屈閣)'등의 이름이 보이고,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특히 태백지역에서는 좀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한다.
창귀는 지억같은 호랑이의 위세권에서 탈출하려고 '사다리'또는 '다리'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려는 것으로 물귀신과 흡사한 행위이다.
창귀는 늘 사돈에 팔촌까지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새 창귀감을 구하는데, 반드시 사람을 불러내거나 유인하여 범에게 데려간다.
그래서 호식되어갈 사람들은 다른사람이 막아도 창귀가 씌여 자꾸 나가려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창귀가 이처럼 끈질기고 무섭다는 데서 호식총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분묘가 유래한다. 호랑이가 먹다 남긴 유구(遺構)를 태우는 것은 모든 화근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창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다.
호식총에 돌을 쌓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뜻함과 동시에 창귀를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는 금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 돌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으니 후손들이 벌초하러 와서 창귀 들릴 일도 없겠다.
돌무덤 위에 시루를 엎어놓는 것은 하늘을 뜻하는 것이며, 철옹성으로 창귀를 가두어 놓는다는 뜻과 살아있는 것을 쪄서 죽이는 무서운 그릇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그 시루 위에 또 쇠가락을 꽂아 두는 것은 무기 또는 벼락으로 창귀를 제압하고자 함이며, 가락의 용도처럼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
토고미마을 토고미마을 소개
- 작성일
- 2024-08-09
토고미마을 소개- 작성일
- 2024-08-09
우리마을은 4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개마을 중 하나인 신대리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신대리는 옛날에 신풍리에 속한 마을로 어귓마을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동리(洞里)가 커지면서 1956년에 토고미, 느릅제기, 작은 토고미를 병합하여 신대리 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유래
우리 마을이 왜 “토고미”인가 하면, 우리고장에는 기름진 옥토가 많아 부자가 많이 살았는데, 농사일에 품을 팔면 꼭 쌀로 품삯을 받았다하여 토고미(土雇米)라 불렸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