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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선학원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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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전화 02-734-9654
   02-734-9655~6
팩스 02-734-3410
  이사장 강천 지광
홈페이지 http://www.seonhakwon.or.kr/
  주소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35-4
   서울 종로구 안국동 40 선학원
   35-4 Yunboseon-gil, Jongno-gu, Seoul
  • 상품 정보

    상세설명

    <선학원 창건 상량문>과 <선우공제회 취지서> 그리고 <법인재산 환수 승소 판결문> 을 살펴보면 민족불교의 선양과 불조정맥 계승의식 그리고 일제의 사찰정책에 항거했던 스님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1921년 친일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남전 도봉 석두스님 등 민족불교선각자들은 3·1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이판계(理判系)의 지도자 만해 스님의 출옥에 앞서,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임제종 운동의 계승과 전통 선풍을 진작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에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을 창립하고자 당시 최창훈 외 다수 신도의 기부받는 한편, 임제종 인사동 포교당의 자재와 기와를 기부 받아 안국동 40번지에 수행도량을 건축하였습니다. 일제의 사찰정책에 대항하려는 수좌스님들의 희망과 노력은 1922년 3월 30일에 ‘선우공제회’ 건립으로 결실 맺게 되었습니다. ‘오성월, 김남전, 백용성, 한용운’ 등 35명의 발기인 명단에서 살펴볼 수 있듯, ‘선우공제회’는 선풍진작과 민족불교의 자주·자립적 기치를 사명감으로 삼아 창립되었습니다. 민족불교 수호를 위한 임제종 운동의 숭고한 의지를 계승하는 한편, 수좌스님들의 안정된 수행도량을 마련하고 대중포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설립된 ‘선우공제회’는 자립자애와 중생구제의 기반을 세운 한국 불교계의 희망이었습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모든 사암(寺庵)은 사찰령(寺刹令)과 사법(寺法)의 직간접적인 통제를 받아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본말사의 주지취임을 포함하여 법회개최를 비롯한 동산·부동산 변동의 소소한 내용까지 일제 총독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선학원 스님들은 '사(寺)'나 '암(庵)'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일제의 불교정책에 대항하는 한편 후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 선학원은 일제의 여러 탄압과 분란책을 이겨내며 견디어 왔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정책적으로 무거운 중과세를 부과하여 운영난을 맞도록 유도한 후 친일단체를 통해 선학원을 장악하고자 여러 교묘한 방책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법인 재산을 친일단체에 분산매각한 후 종국에는 항일민족불교의 산실을 파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후학양성과 수행정진을 위한 터전이 일제에 의해 해체되거나 흡수될 위기에 처하자 선학원 수좌들이 나섰습니다. 수좌스님들은 1922년에 신탁(信託)의 취지로 선학원 건물을 범어사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 경유(經由), 그리고 2년 후인 1924년에 역시 범어사 명의로 선학원이 소유한 대지를 소유권이전등기를 경유하여 후학양성의 자량(資糧)을 지키기 위한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하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6년에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하여 선학원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5년 후인 1931년에 적음스님이 이를 인수하여 재건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때 납자들의 결속과 선풍진작을 위한 수좌회의를 열었으며, 만해스님이 구심점이 되어 발간한 선학원 불교잡지 <선원(禪苑)>을 통해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포교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남녀선우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부인선우회의 정기적 개설이 이루어졌으며, 안국동 41번지 대지와 건물을 선학원 부인신도들이 1932년에 매입, 신탁의 취지로 범어사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유하여 수행도량을 지혜롭게 지켜나갔습니다.

    친일적 사판계에서 ‘재단법인조선불교총무원’을 설립한 바, 이판계 선학원에서는 보다 조직적인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만공스님과 여러 신도들의 기부로 재원을 확충하여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인가를 냈습니다. 이어 이듬해인 1935년 3월 7일에 한국불교의 선맥을 지키기 위해 ‘조선불교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선종종무원’을 발족시켰습니다. 이에 선학원은 조선불교선종의 종정으로 만공, 한암, 혜월스님을 추대하였습니다.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승가의 청정승풍과 불조 이래의 전통선맥을 선양하기 위해 만공, 한영, 동산 등 청정비구 34인이 참석한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선학원에서 개최하였고 ‘범행단’이 조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단법인 선학원은 식민지 불교정책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민족불교의 지도자 만해스님을 중심으로 저항의 기치를 올려왔고, 일제의 사찰령을 견제하며 수좌스님들이 임제종 운동의 전통을 의연히 수호해 온 불교계 독립운동의 터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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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새소식

    소개글

    총 12 건

    재단법인 선학원 소개
    1. 초부적음 (草夫寂音,1900~1961)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출가후 직지사에서 수선 안거를 한 적음 스님은 1922년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경성 선학원에서 열린 선우공제회 총회에서 서무부 이사로 추대됐다. 1927년에는 직지사에서 사교과를 마쳤으며, 1930년에는 만공(滿空) 스님에게 입실 건당했다. 이때 초부(草夫)라는 법호를 받았다.
      1931년 선학원 상임포교사 소임을 맡았으며, 1932년 부산 범어사에서 도첩(度牒)을 받았다. 1934년 조선중앙선리참구원 상무이사를 거쳐, 선학원 3대, 5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조선불교 수호에 앞장섰다. 조선불교문화운동협회 경리(經理) 소임을 보았다.
      1935년 1월5일 조선불교선종 종헌 반포 당시 총무부장에 취임했다. 1941년에는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계승하기 위해 개최된 유교법회에 동참했다. 같은 해 범행단(梵行團)을 결성해 청정비구승단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되던 해 12월17일 정토종 본원사에 호국역경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47년 1월에는 해동역경원을 설립하고 역시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 4월20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5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6월24일 정화운동 발기인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이튿날 교단정화추진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1955년 공주 마곡사 주지로 취임했고, 1956년 3월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노년에 병고를 겪은 스님은 1961년 10월3일 세수 61세, 법납 39세로 서울 선학원에서 입적했다. 제자로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과 동국대 이사장, 공주 신원사 조실을 역임한 벽암(碧岩) 스님이 있다. <적음집>이 발간됐다는 구전이 전해오지만 실체는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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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불로동 출생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1924 김천 직지사에서 제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4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상무이사
      1942~46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 3대 이사장
      1945 호국역경원 초대 원장
      1950~60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 5대 이사장
      1955 마곡사 주지
      1961 선학원에서 세수 61세, 법랍 37세로 입적

    2. 용성진종 (龍城震鐘, 1864∼1940)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1864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손상좌인 도문스님이 생가인 장수 죽림리에 죽림정사를 창건했다. 14세 때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했다 가족들의 만류로 되돌아 온 용성스님은 16살 되던 해 합천 해인사로 다시 출가해 화월(華月)스님을 은사로 모셨으며, 환성(喚醒)스님의 법을 이었다.
      화엄경을 처음 한글로 번역하는 등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데 관심을 쏟았다. 박한영(朴漢永)스님과 함께 불교잡지 ‘불일(佛日)’을 간행하는 한편 일요학교를 개설하는 등 문서포교와 어린이포교에도 앞장섰다.
      일본불교 영향을 받은 조선불교계 일부가 계율을 소홀히 하고 대처를 합리화 하는 것에 반대해 조선불교 혁신을 꾀했다. 1940년 2월24일(세수77세, 법랍62세) 서울 대각사에서 입적했다.
      1962년 국가공로훈장, 1990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저서로 <용성선사어록> <귀원정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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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 전북 남원 출생
      1879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
      1919 3·1운동 민족대표 참여
      1926~27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번역
      1940 세수 77세, 법납 62세로 서울 대각사에서 입적

    3. 만공월면 (滿空月面, 1871~1946)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1871년 3월7일 전북 태인(정읍) 출생. 13세에 김제 금산사, 전주 봉서사, 논산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巖)스님 문하서 행자로 생활했다.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간월암을 중창 또는 복원했다.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 설립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대 중반 ‘조선불교선학원종무원’ 종정을 지내는 등 일본불교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근처 전월사에 머물며 선풍을 일으켰다.
      1946년 10월20일 (세수 75세, 법납 62세.) 원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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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 전북 태인 출생
      1883 공주 동학사 출가
      1884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스님을 은사, 경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
      1934~36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초대 이사장
      1935 조선불교선종 대표 종정
      1946 덕숭산 상봉 전월사에서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

    4. 성월일전( 惺月一全, 1866~1943)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1866년 7월15일 울주군 온사면 우봉리 출생. 속명은 오철근(吳哲根). 부친은 오사홍(吳士洪) 선생, 모친은 김씨였다. 7세 되던 해 부산 범어사에서 보암정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43세 되던 해 담해(湛海)스님을 이어 총섭(總攝)으로 추대되어 가람을 중건하는 등 불사에 진력을 다했다.
      스님은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 정책에 맞섰다. 친일 성향의 원종(圓宗)에 대항해 범어사에 임제종(臨濟宗) 사무소를 둔 것도 성월스님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인재를 키우지 않은데 있음을 절감한 스님은 사람을 키우고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 경성에 포교당을 세웠으며, 선학원의 설립에 적극 참여했다.
      1943년 8월9일(세수78세. 법납71세) 사시(巳時)에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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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 울주군 온사면 우봉리 출생
      1872 범어사에서 보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1899 범어사 금강암선원 등 창설
      1904 범어사에 금강계단을 개설하고 계법을 전수
      1909 범어사 주지
      1919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헌납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서무부 이사 대리
      1934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연구원 초대이사
      1936~42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 2대 이사장
      1943 범어사에서 세수 78세, 법납 71세로 입적

    5. 석두보택 (石頭寶澤, 1882∼1954)
      작성자/작성일
      두레박 24-04-14

      선학원 설립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석두 스님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 9월4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에서 태어났다.
      16세때에 안변 석왕사 백하스님은 보택(寶澤)을 법명으로 내리고 출가를 허락했다. 스님은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헌납(1919년) 등 항일운동에도 관여했고, 선학원 선우공제회 재무부 이사(1922년),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 대표(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평의원(1924년) 등을 역임하며 한국 선불교의 중흥을 꾀했다.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하며 부도암에 선원을 개설했다. 순창 순평암에 머물다 해방을 맞이했다.
      71세 되던 해에 몸이 불편하여 미륵도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기고, 1954년4월25일 오후8시30분(세수73세, 법납57세)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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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2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출생
      1898 안변 석왕사에서 출가
      1919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 헌납
      1921 선학원 남전, 도봉스님 등과 선학원 설립
      1922 선학원 선우공제회 재무부 이사
      1922 조선불교유신회 사찰령 철폐 건백서 대표
      1924 선학원선우공제회 평의원
      1954 세수73세, 법납57세로 미륵도 미륵사에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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