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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서동사 서동사 대웅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서동사 대웅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전각으로 지붕은 익공양식의 맞배지붕으로 위에 한식기와를 얹었으나 막새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 내부는 통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윗면이 평평한 막돌 초석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위로는 주두(柱頭)를 얹고 창방을 걸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최근에는 1990년에 보수한 바 있다.
안에는 목조삼세불상과 관음상 및 삼세후불탱화, 칠성탱화, 신중탱화, 산신도 등의 불화 그리고 중종과 1879년 중수 때 감역을 맡았던 최명륜의 영정이 있다. 삼세불상은 가운데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불화는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삼세불상과 관음상 및 삼세후불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산신도등의 불화, 그리고 중종과 1879년 중수 때 감역을 맡았던 최명륜의 영정이 있다. 그밖에 안에는 <서동사중수서>를 비롯해 <서동사중수시주질>, <서동사노전시주질>, <제서동사>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서동사중수시주질>은 끝부분의 ‘갑자‘라는 간지로 보아 1924년의 대웅전 중수를 기념하며 적은 듯하고 <서동사노전시주질>역시 간지는 지워져 보이지 않지만 그 무렵의 노전 중수를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제서동사>는 천종의(千鍾宜)가 서동사에 대해 읊은 시문으로 ‘정묘’라는 간지로 보아 1927년에 현판을 새긴 듯하다. 또한 <각사찰질>, <각부날질> 등 1950년의 중수를 기념한 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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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서동사 서동사 목조석가여래삼불 좌상(보물 제1715호)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서동사 목조석가여래삼불 좌상(보물 제1715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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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서동사 목조삼존불상은 대웅전내에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불이며, 좌측불상은 약사여래불, 우측불상은 아미타불인 삼세불이다. 삼존불은 크기가 120㎝내외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법의를 감싼 옷주름이나 무릎을 덮은 군의 등 각부분의 양식이 명쾌하고 활달한 감이 있다. 중앙의 본존불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낮고 작게 표현되었다. 나발 중앙의 계주는 크고 반달형이며, 이마 중앙에는 백호가 있고 코는 오뚝하다. 호형의 눈썹에 눈은 가늘게 뜬 정안이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귀는 짧은 편이며 귓볼은 뭉뚱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고 법의는 통견인데 양어깨를 덮고 밑으로 쳐지는 옷주름은 매우 두껍다.
우측어깨를 덮은 법의 자락은 팔의 반쪽만 덮고 있는 반라식을 하고 있고 배꼽위로 나타난 승각기는 일자형의 띠줄과 그 위에 연화형의 의문이 묘사되어 있다. 무릎을 덮은 군의자락은 부채살처럼 펴지고 있는데 특히 좌측 무릎 주위에 자형의 문양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일자형의 띠줄 바로 앞 하단에 뾰쪽하게 솟아난 두 개의 돌출점이 주목된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측손은 구품하 생인을 취하고 있다. 좌우협시불은 모두 여래형으로 머리와 육계와 나발을 표현하였다. 좌측의 여래상은 그 양식이나 기법이 거의 흡사하며, 우측손에 약호를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약사여래로 보이며, 우측의 여래상은 아미타여래로 추정된다.
서동사 삼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불상으로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개금불사원문에 의해 불상의 조성 절대연대가 확인됐을뿐아니라 조성양식에 있어서도 불상의 군의자락의 자형 문양이 나주 심양사불상, 죽림사 아미타불과 유사하는 등 조선시대 불상연구에 중요하다. -
대한불교조계종 서동사 서동사 동백나무 비자나무숲(전라남도 기념물 제 2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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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서동사 동백나무 비자나무숲(전라남도 기념물 제 245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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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해남 서동사 후사면 숲정이는 동백나무와 비자나무가 혼효된 식생군락으로 경관적 식물생태학적 가치가 있다. 크고 작은 동백나무는 총 140여 본으로 흉고 직경이 40~45cm 범위이고 수고는 4~6m로서 그 생륙도 활력도 비교적 양호하다. 비자나무 노거수는 큰 것은 흉고직경이 75~80cm, 수고는 12~18m이다.
동백나무, 비자나무 수령 및 식생분포로 보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히 있으므로 전라남도 기념물로지정하여 동백나무 및 비자나무 숲을 지속적으로 보존 관리할 필요가 있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245호로 지정됐다. -
대한불교조계종 도장사 도장사 금동불상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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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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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도장사 금동불상의 전설-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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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이 절에는 금동불상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의 대웅전이 오래되어 다 허물어지게 되었는데 어느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주지에게 이르기를 법당에 모셔진 부처를 모시고 빨리 대피하라고 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주지가 다음날 부처를 밖으로 모시자 법당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이 불상에 대한 행방을 알지 못하다가 1935년 대웅전을 다시 중수하던 한 목수가 기둥안에 들어있는 금동불상을 발견했다 한다.
그러나 이 금동불상은 다시 도난당하여 현재 행방을 찾을 수 없다. -
대한불교조계종 도장사 도장사 보타산의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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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사 보타산의 도량-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道場)'은 흔히 '도량'으로 읽지만 지금 절을 도장사로 부르는 것은 아마도 처음에 '도장사(道藏寺)'로 창건 되었기 때문인 듯 하며, 1950년대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대웅전의 오른쪽 평방(枰枋)위에 <보타산성주사(補陀山聖住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어 도장사라 부르기 이전에는 한때 '성주사(聖住寺)'라고도 부른듯 하다 -
대한불교조계종 도장사 도장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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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사 대웅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짧은 풍판(風板)을 둔 홑처마 맞배집으로 되어있다. 막돌 허튼층쌓기의 기단위에 윗면을 다듬은 초석을 쌓고 건물 비례에 비해다소 큰 지름인 60cm의 두리기둥을 세웠다. -
대한불교조계종 도장사 도장사 건축물과 문화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사 건축물과 문화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현재 절에는 대웅전과 요사가 있다. 대웅전 앞마당 쪽으로는 대나무 숲을 두어 시각적 차폐(遮蔽)효과와 함께 북쪽으로부터 바람막이 역할도 하고 있다. 도장사는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바람을 막는 차폐 효과의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맛과 겨울에는 안온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다른 절의 대부분이 앞면에서 진입하게 된 것과는 달리 서쪽인 옆에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수백년된 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절의 역사를 짐작하게 해준다. -
대한불교조계종 도장사 도장사 대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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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사 대나무 숲-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사는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바람을 막는 차폐 효과를 위한 것인지 대웅전 앞마당 앞에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여름에는 시원한 맛과 겨울에는 안온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다른절의 대부분이 앞면에서 진입하게 된 것과는 달리 서쪽인 옆에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수백년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절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도장사 도장사 위치와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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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도장사 위치와 창건-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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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도장사(道場寺)는 황산면 관춘리 780번지에 있는 사찰로 황산면 내산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있는 보타산(寶陀山)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
의 말사다. 이 절의 연혁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후기에 편찬된「범우공(梵宇攻)」과 1872년·1895년경에 간행된 「호남읍지」에 도장사(道藏寺)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창건된 사찰로 보고 있다.
‘도장(道場)’은 흔히 ‘도량’으로 읽지만 지금 절을 도장사로 부르는 것은 아마도 처음에 ‘도장사(道藏寺)’로 창건되었기 때문인듯 하며, 1950년대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웅전의 오른쪽 평방(枰枋)위에 <보타산성주사(補陀山聖住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어 도장사라 부르기 이전에는 한때 ‘성주사(聖住寺)’라고도 부른 듯하다.
범해각안이 지은 「동사열전」권5 <용파선사전>에는 조선시대후기 용파선사가 도장사의 시왕(十王)을 영암 도갑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말하고 있어 이로 미루어 볼 때 도장사에 시왕전이 있었으며 십오상(十五像)을 모시고 있다가 봉파선사에 의해 도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근대에서의 절의 역사는 1935년에 쓴 <도장사중건기>를 통해 알아볼 수 있는데 당시 주지는 이춘익, 화주는 박란초였다. 이 중건기에는 도장사가 아닌 성주사로 기록되어 있어 이때까지 절의 이름이 성주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35년 대웅전 중수 시에 금동불상이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중수기 시주자의 방명록에는 1935년과 1938년의 중건에 참여한 시주자 명단이 적혀 있다.
대웅전은 기둥이나 서까래의 크기로 보아 규모가 컸던 절임을 알 수 있으며, 절의 스님에 의하면 1938년 무렵 무너져 내린 것을 대웅전 기둥의 목재를 그대로 이용하여 작은 규모로 줄여서 지었다고 한다. -
대한불교조계종 은적사 은적사 약사전(藥師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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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은적사 약사전(藥師殿)-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3
은적사의 약사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본 건물은 주심포계의 익공구조로 된 자그마한 전각이다. 내부는 통간으로 그 중앙 뒷 편에 고려초에 조성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안치하였다.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와 지장보살도ㆍ제석천룡탱화가 있었으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비로전이 지어지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이밖에 1856년에 기록한 은적암 약사전중건기ㆍ약사전중건시주제원록현판이 있다.
약사전의 구조로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기단 상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5양가로 되어있다. 도리는 장설로 받혀진 굴도리를 걸쳤으며 기둥머리에 걸친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설 사이에는 방형의 화반은 1구씩 배치하였고 그 사이는 벽체로 막음 처리되어 있다.
측면의 중앙 기둥으로부터는 대양위로 충양을 걸었으며 그 머리는 용두형상의 화려한 조각으로 처리하였다. 공포는 행공첨자를 두어 외목도리의 장설을 받치게 한 2익공으로 쇠서의 모습은 초각된 연봉이 그 위에 놓여져 있는 등 복잡하게 장식화 되었다.
창호는 전면 중앙간에 쌍여닫이의 띠살문을, 그리고 양 협간에는 외여닫이의 띠살문을 달았다. 천장은 종양상부에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그 측면으로는 빗천장을 설치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지붕은 전, 후면 겹처마로 된 팔작지붕이다. 이후 비로전이 중찬되어 철불은 그곳에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