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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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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도갑사 도갑사 미륵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도갑사 미륵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함을 보여줍니다.
    조용히 108배 올리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건강의 씨앗을 심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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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도갑사 도갑사 광제루 다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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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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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도갑사 광제루 다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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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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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자유롭게 차를 마시거나 책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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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불교조계종 도갑사 도갑사 광제루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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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도갑사 광제루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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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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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도갑사 광제루 누각에 오르면 월출산은 물론 도량 전체를 조망 할 수 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선생께서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이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라고 노래하셨다고 합니다. 저녁 달이 뜨면 누각에 올라 별과 달을 보며 시조 한 편 욻조려보는 것도 운치 있습니다.
    다각실 이용은 템플스테이 사무국에 문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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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도갑사 용수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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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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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용수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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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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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책 한권 들고 정자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연의 '바람'과 '소리'를 느껴보세요. 사시사철 월출산 계곡물이 끊이지 않는 시원한 폭포. KBS드라마 '성균관스캔들' 촬영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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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도갑사 템플스테이 도갑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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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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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도갑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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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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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한불교조계종 도갑사 도갑사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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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도갑사 연혁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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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0년 신라 헌강왕6년 도선 국사가 창건, 10~11세기 미륵전 석조여래좌상 조성
    1090년 고려 선종7년 도갑사 입구 국장생國長生 조성
    1456년 조선 세조2년 세조의 적극적인 후원, 1464년 966칸 중창
    1473년 조선 성종4년 해탈문 건립
    1608년~ 광해군 시기 인종의 왕비가 전왕前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관음32응신도 봉안
    1633년 조선 인조11년 낡은 전각 중수 (상주대중 730명)
    1653년 조선 효종4년 수미왕사비와 도갑사석교중창비 건립, 국사전에 수미왕사 진영 봉안
    1655년 조선 효종6년 18년에 걸쳐 『도선수미비』건립
    1663년 조선 현종4년 『묘법연화경』 목판본 간행
    1677년 조선 숙종3년 도갑사 사적기 간행
    1682년 조선 숙종8년 당간지주 건립
    1682년 조선 숙종 대형 석조 조성
    1776년 조선 영조52년 연담 유일 스님이 불교사전 『석전유해』 편찬
    1835년 조선 헌종원년 호암화상이 중창
    1960년 미륵전 중창
    1971년 해탈문 중수
    1977년 명부전 보수
    1981년 대웅보전 복원
    1986년 미륵전, 수선당 중수
    1987년 국사전, 지혜당 신축. 수미왕사비, 오층석탑, 대형석조 지방문화재로 지정
    1988년 범종조성, 종각신축
    1989년 1992년 대웅보전 지붕보수, 명부전 후불탱화 봉안, 전통사찰 등록, 일주문복원
    1995년 해탈문수리 보수
    1996년 미륵전 해체 보수, 다명료 신축, 제1, 2차 유적지 발굴조사 시작
    1997년 지혜당 증축, 국사전 주위 정비, 도갑사 진입로 확포장
    1998년 세진당 해체보수, 후원채 증축, 석축 및 담장조성
    1999년 도선국사 성보관 신축, 명부전 이전 신축, 도선로 개설
    2000년 도선수미비수미왕사비 보호각 건립, 제3, 4차 유적지 발굴
    2001년 주차장 조성, 해탈문 보수, 향다각 신축, 도선수미비 참배로 조성
    2002년 오층석탑 이운, 대웅전 삼존불 개금불사, 도선국사 문헌조사, 경내 전기 지중화 사업, 소방시설 확충사업, 도갑사 사적비 건립
    2003년 도갑사 해탈문현판 신각게현,관세음보살 32응신도 대웅보전봉안,범종각이운-대웅보전서남 지혜당 북편
    2004년 일주문 편액괘현,주변정비
    2005년 대웅전터발굴조사
    2006년 극락전이건,보장각건립,산신각 신축,도선국사 문헌조사 사업
    2007년 신검당 신축
    2009년 명부전이축,대웅보전 중창낙성 및 삼존불후불탱화점안 ,前세진당 이축및선불장으로 개축
    2012년 광제루 및 장랑복원
    2016년 템플스테이 체험관 선불장 신축

  7. 대한불교조계종 도갑사 도갑사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도갑사 역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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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으로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

    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  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원중창은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억불숭유'의 열악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도갑사가 불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1653년(효종4년)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가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후로도 사원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3년)에는 당간석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조성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를 편찬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더구나 1977년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가람의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1996년 주지로 부임한 범각(梵覺)스님에 의해 '도갑사 성보관'이 건립되는 등 유관기관의 역사적 검증을 거친 제8차 복원불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도갑사의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앞으로 도선국사의 재조명에 힘입어 새로운 불교문화의 성지로 자리잡아 나갈 것이다.

  8. 대한불교조계종 천태암 천태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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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천태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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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천태암은 신라 문무왕 5년(665년) 혜암율사께서 창건한 고찰입니다.
    고려 명종25년(1195년)에 유명한 보조국사께서 지리산 상무 주암에서 수학을 마치시고 구산선문 태안사에 관심이 있어 둘러 보시고, 뜻을 세워 이곳 아미산 천태암에 오시어 자연석굴에 16아라한을 모시고 법당 요사체를 중창하시고 후학을 제접하셨다.
    또 한 아미산은 중국 아미산과 산세가 비슷하여 아미산 천태암이라 하고 상봉 벼랑끝에 좌선대를 세워 공부하시던 중 하루는 나무새를 만들어 날려 보내니 지금의 조계산에 날아 앉는지라 조계산이 열반지임을 아시고 서기 1200년 송광사로 자리를 옮기셨다.
    세월이 흘러, 1957년 산불로 건물 전체가 전소되어 폐사가 되어있던 중, 호연스님의 불사원력과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2004년에 중창 복원되었다.
    지금은 화엄사 말사로 호연스님은 떠나시고 다른 스님이 와서 정진중이시다.
    이곳 명칭이 목사동인것은, 천태암(天台庵)을 제외하면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옛날에 아미산 아래에 18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8개의 절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파자(破字) 형식을 빌려 붙인 이름이 바로 '목사동(木寺洞)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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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대한불교조계종 보광사 보광사 역사와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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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보광사 역사와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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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1905년 거사(居士) 김기춘이 창건하여 수행처로 삼던 곳이다.
    1942년 김기춘의 아들인 도광(導光)과 도천(道川)이 중창하고 선방(禪房)을 열어 많은 선승(禪僧)을 배출하였다.
    특히 도광의 제자 100여 명 가운데 화엄문도의 중진들을 이곳에서 배출함으로써 화엄문도의 산실이 되었다.
    도광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白龍城)의 상좌인 동헌의 제자로 화엄사(華嚴寺) 주지를 지냈다.
    사찰의 대웅전(大雄殿)과 일주문(一柱門)은 각각 경기도 안양시 용화사와 여주 신륵사의 것을 해체·이전하여 복원하였다.

  10. 대한불교조계종 석천사 석천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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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석천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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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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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여수불교의 역사

    석천사는 임진왜란 (1592 ~ 1598) 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지어졌으니 약 411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여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다행히도 창건 당시와 이후 300여 년간을 좌수영과 함께한 기록들이 단편적으로 있어서 대략의 역사를 엮는데는 어렵지 않다.
    여수 불교의 유입은 여수 바다 건너 동쪽편 남해에는 한국불교의 공식 전래(372年 고구려) 보다 수십 년 앞선 가야의 김수로왕과 허 왕후에 의해 전래된 남해 보리암을 지척에 두고 있어서 좀더 오랜 역사를 가진 것 같지만 기록이나 유적이 없으며, 향일암의 연기설화도 역사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기록에 의한 여수 불교의 공식유입은 흥국사 사적기( 1691년 편찬)의 기록에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사적기에는 송광사에서 수선결사를 한 불일보조국사께서 송광사에 법석을 펼치기 전 대구 팔공산 거조암 결사 시절 결사터를 찾다가 현재 금오도 (남면)에 머물게 됐고 이어서 금오도의 뱃길인 돌산 군내 은적암을 창건 하셨고, 이어 1195년 (고려 명종 25년) 흥국사를 창건하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흥국사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송광사로 법석을 옮겼으며 흥국사는 암자 정도로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560년경 보조의 법손인 법수(法修)대사에 의해 조그맣게 중창되면서 임란을 맞이했고, 임란 때엔 이 충무공과 함께 전라좌도의 구례, 광주, 곡성, 고흥, 남해, 순천, 여수 등지에서 1593년에 30여명의 스님네들이 흥국사에 집결하여 임란에 참전하면서 불교의 여수 유입이 구체화 되었다.
    임란 전체의 전투참전을 통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지고자 했던 의지와 원력이 담긴 호국의 불교가 시작 되였다 하겠다.
    임란이 끝난 후에는 전후 복구사업과 일본의 재침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돌아가신 고혼들을 위해 종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수륙 고혼 천도재를 300여 년 동안 지냈으며 현재도 계속 이어내려가고 있다.
    또한 재침을 막기 위해서는 승군 300여명을 계속 유지 시켰으며, 흥국사를 중심으로 석천사, 한산사, 향일암, 은적암, 용문사, 만흥사 등지에서 최고 많을 때엔 627명의 승려가 운집해서 국가의 방어와 호국에 대한 기원 그리고 수행과 불법을 펴는데 주력해왔다.

    석천사의 역사

    석천사도 이러한 여수불교 역사속의 한 부분이다.
    임란 당시 참전했던 300여명의 의승 수군들 중에 승군 대장역을 하셨던 옥형, 자운의 두 분 스님이 계셨는데 자운스님은 화엄사가 출가 본사로 서산대사와 부휴선사와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당시 선. 교양 승과 가운데 교과의 최고인 화엄대선의 과거에 합격한 뛰어난 학승 이였다.
    임란 발생과 함게 조카 상좌인 벽암각성(뒤에 승군팔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구축한 분)과 함께 해전에 참전했으며, 옥형스님의 기록은 거의 없어 알 수 없으나 자운스님과는 속가의 형제분이라는 불가의 전언이나 또한 석천사에서 옥형과 자운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3월 중순 정일에 제사지낸 연유 등을 보면 매우 가까운 분이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 장군이 관음포에서 돌아가시고 시신이 아산으로 옮겨간 후 전우로서 같이했던 지방의 의병들은 몸과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였는데 이때 이 지방의 향교 교리인 박대복 선생 또한 의병으로 참전했다가 공이 돌아가신 후 본인이 혼자라도 제향을 드리고 싶어 평소 장군이 재세시에 자주 오르내리시면서 石泉의 석간수를 마시던 인연 있는 곳에 공의 사당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옥형 스님 역시 충무공을 잊지 못하고 사당 곁에 당우를 짓고 80평생을 사당에 제향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석천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 같다.

    옥형스님의 꿈에 충무공이 나타나면 바다에 변고가 있어서 공이 돌아가셨어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그렇겠느냐고 기록되여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공과 병사, 승려, 백성들이 한마음 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에도 300여년 (1896년까지) 동안 석천사 주지가 충민사 수호승장으로 소임을 살면서 석천사와 충민사는 유림과 불교도 모두가 서로 구분하지 않고 살았던 모범이다.
    승유배불 정책을 중앙에서 펼칠 때도 이곳은 모든 관, 민, 유, 불이 모두 합심했던 화합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에도 일반 시민들은 충민사라는 이름을 모두 알지만 충민사가 절인 것으로 알고 있고, 석천사는 대부분 모르지만 석천사, 충민사가 같은 절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도 충민사 사당을 수호한 사람들이 300여 년 동안 스님 이였으며, 유림 또한 유불을 가리지 않고 전쟁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마음이 됐던 진실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살았던 모습들을 느낄 수 있다.

    석천사의 근대내력


    전라좌수영이 해체되고 (1896) 다시 한일합병이 되면서 일체치하로 들어가자 일본 제국주의는 이충무공과 조선수군, 그리고 의병의 활동근거를 없애기 위해 흥국사 승군도 그쯤에서 해체되고, 수륙재도 중단됐으며 충민사 제향도 드리지 못하게 해서 절에 오는 신도로 가장해서 새벽에 몰래 제사를 지냈으며, 석천사에 모셔졌던 옥형. 자운스님의 영정마저도 경찰서장이 압수해서 가져가고 난 뒤, 해방이 되며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와중에 석천사 역시 충민사와 함께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충민사 역시 1601년에 국가 현액 사당으로 충무공을 모시는 첫번째 사당 이였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사당을 없애기 위해 토지 매입을 시도했으나 유림들과 스님들이 공동명의를 함으로써 겨우 유지할 수 있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1978년도 박정희 정권시절 이충무공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을 때 충민사를 성역화 한다는 지방의 생각들과 맞물려 충민사를 성역화 하면서 중요한 역사인 석천사와 충민사는 화합의 호국호민임을 알지 못하고 석천사를 제외시키고 충민사만 성역화하면서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사적을 많이 훼손해 버렸다.
    이를테면 사당의 신축은 옛 모습을 알 수 없게 했고, 300년 동안 석천사 주지가 유림들과 재향을 행했던 요사도 없앴으며, 대웅전 앞에 관리실을 짓는 등 많은 손실이 있었다.
    그러면서 석천사 일주문도 없어졌으며, 요사채도 원 위치에 있지 못하고 형상변경이 됐고, 대웅전도 25여 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에는 새로이 지은 법당이다.

    석천사는 현재 대웅전과 3동의 요사채 그리고 종각 등으로 구성된 아담한 암자이다.
    그러나 400여 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항상 시민들과 함께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에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도 수는 약 3000 여 세대이며, 월요법회, 화요법회, 수요법회, 기초교리법회, 초하루법회 등 경전을 중심으로 법회를 하고 있으며, 어린이 법회는 시작을 하여 진행 중이다.
    그리고 복지사업은 (복지법인)노인전문요양시설 하얀연꽃 , 여수시 노인복지관, 시니어 클럽, 문수종합사회복지관, 방과 후 공부방, 자활후견기관, 연꽃 어린이집, 옹달샘 어린이집 등이 있으며, 또한 환경운동연합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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