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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 미황사 우전국 이야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미황사 우전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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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2

    창건설화에 나오는 우전국은 어떤 곳일까?

    우전국은 지금의인도이다. 이 나라에 관한 기록은 진나라 때인 3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엄경]의 번역자 법현 스님이 쓴 [법현집]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우전국은 부유한 나라로 백성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 만명의 승려들이 대승불교를 배우고 있었다. 법현 스님 일행을 맞이한 우전국 국왕은 ‘구마제사’라는 절에 머물게 했는데 3천 여명의 승려가 살고 있는 큰 사찰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때를 축하하는 축제도 열렸는데 14곳의 큰 사찰을 돌며 14일 도안이나 계속하는 큰 잔치였다. 우전국에는 ‘왕신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3대의 왕에 걸쳐 세워진 이 절은 탑의 높이가 75미터나 되었으며 기둥과 창문은 모두 금으로 칠한 화려한 모습이었다. 5세기 초 우전국의 사찰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법현 스님 이후 200여 년이 지나 현장 스님 또한 ‘왕신사’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에 3백미터나 되는 탑이 서 있었다. 현장 스님 기록에 따르면 우전국에는 사찰이 100여개, 승려가 5천 여명이 있을 정도로 불교가 크게 번창하였다. 국왕은 스스로 비사천문의 후손이라 하며 불법을 귀히 여겼다. 우전국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것들을 종합해보면 불교를 국교로 하여 나라를 다스리던 불교국가 였음을 알 수 있다.

  2.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 미황사 달마대사와 달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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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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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미황사 달마대사와 달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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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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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중국에도 소문났던 고려시대 미황사

    [동국여지승람]에 고려의 무외스님의 글을 인용한 미황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달마산에 미황사와 도솔암 등 12개의 암자가 있었다. 지원(1264) 신사년 겨울에 중국 남송의 배 한 척이 달마산 동쪽 바다에 도착했는데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하던데 이 산이 그 산인가.”하며 한 고관이 주민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달마산을 향해 예를 표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성만 듣고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리 보니 여기서 나고 자란 그대들이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항상 머무를 만 하구려.” 하며 참배하고 화폭에 담아갔다.

    고려 후기에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이 중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달마대사는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서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27대의 법을 이은 반야다라존자의 제자가 되었다.스승의 부탁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양나라 무제를 만나다.

    양나라 무제와의 문답을 통해 아직은 법을 펼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 숭산의 소림굴에서 9년간이나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면벽한다. 이때 찾아 온 선종禪宗의 2대 조사인 혜가대사를 만나 선법을 전해주고는 중국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중국과 베트남, 한국, 일본이 달마대사를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모시고 선 수행을 이어오는 곳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달마대사의 행적이나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은 없다.

    그때의 중국인들은 달마대사가 해동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 이 곳 달마산이라며 찾아오고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미황사의 옛 기록을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달마대사의 법신이 항상 계시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 미황사 서산대사와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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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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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미황사 서산대사와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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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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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불사와 법회들로 활기찼던 조선시대 미황사

    조선 전기에도 미황사의 사세는 꾸준히 유지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미황사와 통교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정유재란(1597년) 때 이 지역의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전각들이 불타면서 기록까지 없어져버렸다.

    조선 중기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대둔사와 미황사로 내려오면서 조선시대 중.후기의 중심 사찰이 된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열반에 드신 서산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상좌인 소요대사와 법을 이은 손상좌 편양선사가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시고 대둔사에 내려온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의발을 대둔사에 모시고, 편양선사로 하여금 법을 펼 수 있도록 도량을 만들어주고, 함께 내려온 서산대사의 직계상좌들과 함께 미황사에 모여 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대둔사의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의 스님들은 편양선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들이고, 미황사의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의 분들이 소요대사의 법맥을 잇고 있는 분들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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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 미황사 창건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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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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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미황사 창건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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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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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미황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

    1692년(숙종 18년)때 지은 [미황사 사적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려 다가갔지만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이 말을 들은 의조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스님들과 동네 사람 100여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聖衆,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그날 밤 의조 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金人이 “나는 본래 우전국優塡國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남으로 여기게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의조 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아니했다. 의조 화상은 소가 처음 누던 자리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5. 대한불교조계종 미황사 미황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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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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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미황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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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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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89m) 자락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달마산은 백두대간의 맥이 마지막으로 솟아올라 이루어진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는 병풍같이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 무렵의 낙조의 모습 등 산경을 배경으로 한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기는 산등성이의 온갖 기암괴석으로 인해 미황사를 뒤로한 산이 수십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 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1692년(숙종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가 있다. 미황사의 부도전 옆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8)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 · 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 까지 두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 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C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 有一)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스님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년(철종9) 에는 영허의현(靈虛義玄)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요사체 등이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 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가 28기, 탑비가 6기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 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빛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있고, 진법군고의 깃발에는 바다거북이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다.

  6. 미황사 템플스테이 미황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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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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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미황사 템플스테이 시설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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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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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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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22교구 대흥사 고승대덕 서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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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11
    고승대덕 서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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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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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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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는 호가 청허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숭인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때에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되어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와 판선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까지 올랐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 지리산 두륜산 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어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이유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간단한 주를 붙인 「선가귀감」과 선과 교를 대비하여 풀이한「선교석」, 선과 교의 차이를 간결하게 해설한 「선교결」, 수도생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은 「운수단」, 시문을 모아놓은 「청허당집」이 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촉으로 그 유품을 보관하면서부터 조선후기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를 세움으로써 절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임진왜란 때 구국의 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산대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불교는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22교구 대흥사 고승대덕 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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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4-05-11
    고승대덕 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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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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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초의선사

    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 출신으로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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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 강사인 완호윤우(琓虎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 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지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茗禪)’이 대흥사에 전해온다.
    초의선사는 중년 이후 큰 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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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道의 중흥

    茶道란 차를 마시는 멋과 더불어 인간의 건전한 삶의 길을 걷자는 것을 말함이다.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기호음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차는 우리 인간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이다.

    뿐아니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알뜰한 각성의 생활을 체득(體得)하게 된다.

    즉, 다도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면에 있어 사심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기르고 나아가 봉사하고 일하는 실천력을 기르고 이를 통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다같이 한없는 기쁨속에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대흥사의 초의선사가 김명희에게 보낸 다시(茶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 (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서 「차는 풀의 현성(즉, 禪)이다. 현미한 도, 청화의 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왕(善德王 632~647) 때의 일이다. 그러나 차가 우리나라에서 널리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흥덕왕(興德王) 3년(828年) 김대렴(金大廉)이 당(唐)나라로부터 차의 종자를 가지고와 왕명(王命)으로 지리산(智異山)에 심은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로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호남(嶺湖南)은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이는 이지방의 기후 및 입지조건이 적당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차는 승려(僧侶)와 화랑(花郞)들을 중심으로 유행하였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 차가 널리 유행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차가 상당히 쇠퇴하였으며 이것은 불교의 쇠토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신라때부터 유행하여 오랜 전통을 이어오던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는 조선후기 대흥사(大興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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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선일미사상

    초의스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塵穢,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精氣)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스님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交遊)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초의에 있어서 차와 선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해야한다고 강조한다. 한잔의 차를 통해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초의의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선사인 초의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로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 했으니 그에게는 선과 차가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서가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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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의선사의 인연

    초의선사는 산속 절집에 사는 스님이면서 홀로 명상으로 선(禪)만 하는 스님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를 위시하여 홍현주.석주형제, 윤정현, 권돈인, 자하신위,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 형제, 산천 김명희, 신헌등과 교류 했으며,후에 남도종화의 대가 소치 허유는 그가 키운 제자이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보다 24년이나 후배였다.
    초의는 다산에게서 유서(儒書)를 빌어 읽고 시를 배웠으며, 또한 역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들 교유에는 풍류스러움이 넘쳐 흘렀고 다산과 초의에게는 그들이 즐겨마시는 차가 있었다.
    다산은 이미 혜장으로부터 다도를 배웠고 초의는 우리나라 다도의 달인(達人)으로 불릴만큼 조예가 깊던 인물이다. 다산이 처음 다도를 알게 된 것은 혜장으로부터이 겠지만 다도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아무래도 초의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자이자 실학자이며, 우리나라 제일의 문장가인 동시에 최고의 명필로 추사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충남 예산에서 1786년 태어난 그의 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등이며 자는 원춘이다. 추사의 아버지는 그를 무척 사랑하여 그가 24세 되던 해에 청나라에 동신사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류를 맺었는데, 그들을 통해 금석학과 실학 등을 배웠으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특히 청나라 상류사회에서 배운 차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후일 이 차 문화의 영향으로 동년에 태어난 초의선사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으며, 초의와의 인연은 무척이나 각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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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는 제주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차를 마시기도 했고, 초의가 그를 못 잊어 제주도로 건너가 반년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추사가 10년 먼저 세상을 뜨자 초의는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저 세상에 가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라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의 교류에 고리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차였다. 언젠가 초의가 만든 차를 맛본 추사는 초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 문구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 차를 빨리 보내달라고 조르는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초의가 차를 제때 보내주지 않으면 그는 다그치듯 서신을 다시 보냈으며, 으르고 을러서 고대하던 차가 도착하면 샘물을 직접 받아 정성껏 달여 차를 음미하였다. 초의가 만든 곡우차를 추사는 특히 좋아하여 천하제일의 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또한 차에 관한 많은 글을 짓고 수백에 달하는 호를 지었다.

    예를 들면 ‘승설’,‘고다노인’,‘다문’,‘일로향실’ 등의 호가 있고, 초의에게 차를 선물 받고 써준 ‘명선’,‘죽로지실’,‘다로경권실’,‘다산 초당’ 등이 있다. 이들 중 명선은 초의선사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그의 호 중 하나인 ‘경향다로실’은 그가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일찍이 초의가 추사에게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했으니 차란 군자와 같아서 사특함이 없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하였는데, 추사는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라고 화답하였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이 경지들이 모두 다선삼매가 아닐 수 없다. 추사는 또 많은 다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다음의 시구에서 백석(白石)의 소탈한 삶을 부러워하는 애틋함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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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다송

    동다송은 초의가 다도를 알고자 하는 홍현주를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동다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전편이 동다에 관한 항 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동다에 관한 항은 전체 31항 가운데 6항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에서 전해지는 차에 대한 선이적인 전설이나 차의 효험, 산지에 따른 다명과 그 품등 그리고 다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조다, 천품, 포법, 다읍법 등을 말하고 있다.

    초의는 '우리차의 품질에 대하여 차의 색과 향기가 함께 뛰어나다'고 평하며 '동다기에 어떤 사람은 동다의 효가 월산다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건대 색, 향기, 미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 또 다서에는 육안지방의 차는 맛으로, 몽산의 차는 그 약효로 뛰어났다고 하나 동다는 이 두 가지를 겸하고 있다.'라고 했다.

    [제30송]
    一傾玉花風生腋 일경옥화 풍생액하고 身輕已涉上淸境 신경이섭 상청경이라
    明月爲燭兼爲友 명월위촉겸위우하고 白雲鋪席因作屛 백운포석인작병이라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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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의문화제

    장소 : 대흥사 일원
    주최 : 초의문화제 집행위원회
    주관 : 대흥사, 일지암, (사)해남다인회, 자우다회, 남천다회
    문의 : 061-535-0986, 534-2421

    우리나라에는 이제 전국적으로 다회가 3백여 단체에 이르렀고, 다도를 익히려는 다인은 약 2백만명이나 된다. 이를 통괄하는 단체로는 한국다인연합회와 한국차문화협회가 있고, 해남에는 한국다인회 해남자우다회 등 4개의 다회가 차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다문화(茶文化)의 중흥조이며 시(時), 서(書), 화(畵)의 달인이었던 초의선사의 다도(茶道)정신을 기리는 초의문화제는 1992년부터 초의선사 의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에 그가 40년간 거했던 대흥산 일지암 에 모여 헌차제례를 올려오던 것을 더욱 내실있게 확대하여 불교 문화재가 산재한 대흥사 와 일지암 , 등에서 거행되고 있다.

    초의스님 영정 앞에 다인들의 뜻과 마음을 차에 담아 바치는 의식인 ‘헌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접빈 다례를 기연한 후 관광객들에게 차 우리는 법을 알려주고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행다', 다기, 차내는 모습 등을 재현함으로써 당시의 생활상과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백제차 재현' 등이 열리며, 일지암 에서 부처님과 초의 스님께 차를 올리고 전국에서 온 여러 다회가 모여 차를 나누며 관광객들에게도 대접하는 일지암 들차회, 차를 주제로 한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으로 남도의 판소리 가락이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제, 사계절 동안 변화되는 차의 모습과 차를 만드는 과정을 일관할 수 있는 차사진전시회, 어린이, 대학동아리, 일반차회 등에서 익힌 차생활의 모습을 서로 견주면서 차의 정신과 멋, 실용성 등을 서로에게 배우는 차겨루기가 있고, 그 밖에 한국화 그리기, 차이야기(茶談), 차음식전시, 차시전시, 다구전시 및 기타 판매 행사 등이 있다.

    특히 시기적으로 단풍철에 열리던 초의문화제를 2008년부터 찻잎이 나는 봄철과 초의스님의 탄생시기에 맞추어 개최시기를 조절하였으며 많은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문화축제이다.
    해남 버스터미널에서 대행사 입구행 군내버스가 30분간격으로 운행.
    자가용일 경우 해남읍에서 완도방면 13번국도를 따라간다. 해남읍내를 벗어나면 왼쪽으로 대둔사 가는 806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신기리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806번 지방도로로 계속 가면 대흥사 집단시설지구와 주차장이 있다.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22교구 대흥사 고승대덕 표충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1
    고승대덕 표충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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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 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청허당 서산대사를 주벽으로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뇌묵당 처영대사를 배향하고 있다.
    사찰 경내에 유교형식의 사당을 겸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독특한 경우에 속한다.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하나인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드는 불가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다.

    건물의 배치는, 돌담의 안쪽 중앙에 북향(北向)으로 사당이 있고 그 좌우측 아래편에는 조사전(祖師殿)과 표충비각(表忠碑閣)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 외곽에 있는 재실 건물이던 의중당과 강례재 주위에 담을 두르고 솟을삼문을 세워 사문(祠門)으로 삼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나직한 1단의 기단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의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돌리고 장여도리가 결구되었으며, 주심포계 익공식의 포작으로 보와 지붕 위에 쇠서가 보인다.
    창호는 3칸 모두 2분합인데 띠살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을 바람막이판이 있고 겹처마이다.

    표충사 경내에는 별도의 비각이 있는데, 비각 내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이 중 1기는 표충사건사적비로 높이 316㎝로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이수를 갖추었다. 건립연대는 「성상십육년임자오월일, 서산육세법손연담유일근찬, 응운등오근서(聖上十六年壬子五月日, 西山六世法孫蓮潭有一謹撰, 應雲登旿謹書)」란 내용으로 보아 정조 16년(1792)이며, 찬자는 연담유일, 글씨는 응운등오가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1기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로 높이는 364㎝이며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사각형의 지붕돌을 올렸다. 건립연대는 비신측면에 「숭정기원후삼신해월립」이란 명문으로 보아 정조 15년(1791)임을 알 수 있다. 청허당 유정은 임진왜란 때 80노구를 이끌고 구국운동의 선봉에 나서 활약한 승병대장으로 선조가 「국일대선사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란 긴 호를 내렸다.

    표충사는 정조 12년(1788) 왕이 표충사라 사액하였으며 대사의 7세법손인 천묵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제향케 하였다.

    비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내부에 서산대사와 건사사적비(建祠事蹟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조사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전각(殿閣)이다. 그 밖에 경내에는 의중당, 명의재, 강례재 등의 건물이 있다.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22교구 대흥사 대흥사 천불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1
    대흥사 천불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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