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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산령각(山靈閣)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산령각(山靈閣)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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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령각(산신각)은 삼성각의 동북쪽에 거의 붙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단칸으로 남향하고 있는 아주 작은 건물로 맞배집이다. 처음의 건립은 영조 37년(1761)이며 哲宗代 : 1850 - 1863)에 중수(重修)를 거쳤으나 현 건물은 1986년에 소실되었다가 당시 주지 원명(圓明)화상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일반적으로 산신탱을 안치하였으며 산신은 옆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어 산신(山神)과 호랑이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1600여 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토속신앙(土俗信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예가 바로 사찰(寺刹)안의 산신각이나 칠성각(七星閣) 등이다. 산신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산악신앙(山岳信仰)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산속에 위치하는 사찰의 일각에서는 별도로 산신각을 지어 신앙하게 된다.

    통도사에는 일종의 호랑이 혈맥(血脈)이라 할 수 있는 호혈(虎血)이 있다 하여 사내(寺內) 두 곳에 이를 진합할 호혈석(虎血石)을 배치하고 있는 것도 산악신앙과 함께 흥미로운 일이다. 이 호혈석은 현재도 응진전 바로 옆 남쪽과 하로전(下爐殿)의 극락전(極樂殿) 옆에 위치한다. 이처럼 산신은 산악숭배사상(山岳崇拜思想)에서 나왔고 칠성(七星)은 도교신앙과 관련이 깊은데 이러한 것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殿)이란 명칭을 쓰지 않고 대개 각(閣)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와 토속신앙이 융합되어 있는 좋은 예(例)라 할 수 있다.

    산신탱화(山神幀畵)

    산신은 가람의 외호신(外護神)인 까닭에 사찰의 뒤쪽 외각에 산신각(山神閣, 또는 山靈閣)을 짓고 그 안에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상이나 산신탱화를 봉안한다. 산신탱화는 독성탱화와 도상면에서 일견 유사한 면도 있으나 엄격한 이미지의 독성과는 달리 산신은 인자한 미소에 복스러운 모습으로 호랑이와 함께 나타나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산신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오해가 적지 않다. 즉 산신이 원래는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속신 이었으나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중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나름대로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는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일컬어지는 산신에 대한 개념의 근거는 화엄법회에 동참했던 39위의 화엄신중 가운데 제 33위에 엄연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신을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앙만으로 보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석문의범』의 산신청(山神請) '가영(歌詠)'에서는 산신은 "옛날 옛적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부촉을 받으시고, 강산을 위진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푸른하늘 청산에 사시며, 구름을 타고 학처럼 걸림 없이 날아다니시는 분(靈山昔日如來囑 威鎭江山度衆生 萬里白雲靑障裸 雲車鶴駕任閑情)" 이라고 찬탄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2/3가 산이기에 선조들에게 있어서 산은 곧 생활의 터전이었다. 산을 의지하여 살았고 또 죽어서는 그 곳에 묻혀야 했던 사람들이 산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산악 숭배가 전국의 곳곳에 산신당(山神堂)을 짓고 숭배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그런 이유만으로 불교의 수호신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주지하였다시피 화엄경 등의 교의적 근거가 있었기에 소재강복(消災降福: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내리는)의 외호신으로 무리없이 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신은 조각상보다 탱화로 도상화하여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문경 김용사(金龍寺)의 산신탱화를 보며 산신의 위의를 교의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산수와 노송을 배경으로 가운데 큼직이 앉아서 인자한 미소와 눈빛을 보이는 산신은 왼손으로는 수염을 만지며 오른손에는 백우선(白牛扇)을 잡고 있다. 산신청 '거목(擧目)'에, "만 가지 덕을 갖추고 뛰어난 성품을 한가롭게 가지고 계시며(萬德高勝性皆閑寂山王大神)", '사찰이 자리한 산에 항상 계실(比山局內恒住大聖山王大神)'뿐만 아니라 '시방법계에서 지극한 영험을 나타내시는 분(十方 法界至靈至聖山王大神)'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도록 덕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가서 의지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로 넉넉한 산신의 왼쪽에 있는 호랑이는 무섭고 위엄스럽기보다는 애교스러운 자태로 표현되어 친근감을 주고 있다. 산신의 왼쪽에는 차를 준비하는 동자와 오른쪽의 경서를 든 동자 그리고 산신의 뒤로는 힘찬 소나무의 뻗은 가지와 잎이 화면의 상단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청록산수 기법으로 표현된 화려한 산수에는 장수와 청정을 의미하는 소나무, 해 등이 있고, 새들이 노닐고 있으니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항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오른쪽의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는 다자(多子)를 뜻한다. 동자와 동녀의 모습은 산신에게 올리는 기원의 시각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 같은 불화의 많은 도상들은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신행자의 심중소구(心中所求)를 담은 복합적, 동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의 산신탱화가 전국의 사찰에 모셔져 있다는 것은 토속신으로서의 소박한 수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으로도 교리적 근거가 분명하며, 나아가 각종 공해로 강산의 폐해가 심한 요즈음 산신신앙의 재조명을 통해 환경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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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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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통도사의 선원(禪院)의 역할을 하고 있는 보광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의 구조를 하고 있다. 보광전과 방장(方丈) 스님의 거처인 정변전, 부속 건물로 요사와 욕실 등으로 건물이 구성되어 있다.

    보광전의 초창은 1757년(영조 33)에 범음대사(梵音大師)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현 건물은 1970년 당시 주지인 청하(淸霞) 스님이 건립하여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 선원에는 일반인이 출입이 금지되고 매년 하안거, 동안거를 실시하고 있다.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서 7월 15일까지이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 각 3개월로 되어 있다. 안거일은 전국 선원이 모두 동일하며 이 기간을 결제기간이라 한다.

    주련 : 보광전(普光殿)


    선원
    拈花四十九年後 염화사십구년후염화미소 49년후에
    擊鉢千七百案中 벽발천칠백안종발우를 들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
    一毫頭建寶王刹 일호두건보왕찰한터럭 머리에 불국토를 건립하고
    微塵裏轉大法輪 미진리전대법륜미진 속에서 대법률을 굴린다.
    想見東坡老居士 상견동파노거사서동파 노거사를 생각해보니
    儀然天竺古先生 의연천축고선생의연한 천축의 고선생이라
    水光出洞爲明月 수광출통위명월물빛이 동굴에서 나와 밝은 달이 되고
    石氣上天如百雲 석기상천여백운돌기운이 하늘로 올라 흰구름과 같고


    선원요사체
    若識無中含月象 약식무중함월상만약 ‘무‘ 가운데 달을 머금은 모습을 알면
    昨日土墻堂面立 작일토장당면입어제의 흙 담장이 얼굴을 마주하고 서다.
    今朝竹庸向陽開 금조죽용향양개오늘 아침에는 대쪽으로 된 문이 벽면을 향해 열린다.
    議論吐爲仁義辭 의론토위인의사토를 의논하니 인의의 말이 되고
    文章散作生雲福 문장석작생운복문장을 흐트려 지으니 구름처럼 복이 생긴다.
    第一名花翡翠甁 제일명화비취병비취병에 으뜸가는 꽃이 그려져 있고
    無雙彩筆珊瑚架 무쌍채필한호가둘로 없는 채색 붓으로 산초가를 세운다.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탑광실(塔光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탑광실(塔光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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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영조 33년(1757)에 범음대사(梵音大師)가 초창하였다고 전하며 1968년 청하(淸霞)스님이 중건하였다. 건물은 전면 8칸. 측면 3칸으로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대웅전 맞은 편에 있으면서 불전(佛殿)에 공양(供養)을 짓던 부엌과 향나무를 쌓아 두던 향적전(香積殿)이 있었다. 설법전 불사 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졌다.

    주련
    塵墨劫前成正覺 진묵겁전성정각진묵겁전에 정각을 이루어
    恒沙界內化群迷 항사계내화군미항하사속 중생을 계도하네
    廓周沙界聖伽籃 곽주사계성가람사계에 성인의 가람을 넓히니
    滿目文殊接話談 만목문수접화담눈에 가득한 문수가 담화에 접하니
    言下不知開活眼 언하부지개활안언하에 물록 활안이 열리고
    回頭只見舊山巖 회두지견구산암머리를 돌려 다만 오래된 산과 바위만 보네.
    普賢身相如虛空 보현신상여허공보현의 몸매가 허공과 같으니
    依眞而住非國土 의진이주비국토진리에 의지해 주하고 국토가 아니도다
    隨諸衆生心所欲 수제중생심소욕중생들이 마음에 좋아하는 것 따라서
    示現普身等一切 시현보신등일체넓은 몸을 일체에 평등하게 시현하시다.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정변전(正변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정변전(正변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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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장스님 요사 및 집무실 방장실(方丈室)이라고도 하며 유마경에 유마거사(維摩居士)가 4방 10척(약 3m) 되는 방에 3만 2천 사자좌를 벌려 놓았다는 것에서 비롯된 말로 중국에서는 선사(禪寺)의 주지가 쓰는 거실을 의미했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총림의 최고 어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方丈)스님의 주석처로서 선원. 율원. 강원. 염불원 등 대중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편액 : 정변전(正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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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호혈석(虎血石)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호혈석(虎血石)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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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을 사모한 처녀의 전설

    먼 옛날 통도사 백운암에는 젊고 잘생긴 젊은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스님은 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물론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성심껏 기원하고 있었다. 여느때 처럼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경을 읽고 있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봄나물 가득한 바구니를 든 채 서 있는 것이었다. 나물을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은 처녀가 이리저리 헤매면서 길을 찾다 백운암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막막하던 차 불빛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온 처녀는, 어렵더라도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방이 하나뿐인 곳에서 수행중인 젊은 스님으로서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그러나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던 스님은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주고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의 경 읽는 음성에 어느덧 처녀는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 처녀는 스님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고, 마음은 늘 백운암 스님에게 가 있었다. 스님을 흠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 마침내 처녀는 상사병을 얻게 되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좋은 혼처가 나와도 고개를 흔드는 딸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처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가 백운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의 이야기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숨김없이 듣게 되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딸의 사연을 알게 된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백운암으로 그 스님을 찾아갔다.

    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살림 차려 줄 것을 약속하며 혼인을 애걸하여도 젊은 스님은 결심을 흩뜨리지 않고 경전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죽음에 임박한 처녀가 마지막으로 스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였으나 그마저 거절하고 말았다. 얼마 후 처녀는 사모하는 한을 가슴에 안은 채 목숨을 거두고 사나운 영축산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많이 지나고, 그 젊은 스님은 초지일관한 결과로 드디어 서원하던 강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많은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어느 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큰 호랑이가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점점 사나와지기 시작하였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분명 스님들과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는 데 중지를 모으고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졌다. 호랑이는 강백 스님의 저고리를 받더니 마구 갈기갈기 찢으며 더욱 사납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자 강백 스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속세의 인연인가 보다 하고 앞으로 나서며 합장 예경하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음날 날이 밝자 산중의 모든 사람들은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깊은 골짜기마다 다 뒤졌으나 보이지 않던 스님은 젊은 날 공부하던 백운암 옆 등성이에 상처 하나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강백 스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심볼'은 보이지 않았다. 미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호랑이로 태어난 처녀는 살아생전 흠모하던 스님과 그렇게라도 연을 맺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血)을 눌러야겠다 하여 붉은 색의 호랑이 피를 묻힌 큼직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놓았다. 이를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압석(虎壓石)'이라 부르며 상로전 응진전 바로 옆과 하로전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템플스테이 수련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템플스테이 수련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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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백여명의 대중을 수용 할 수 있는 수련시설이다. 남녀 샤워실, 화장실, 대방을 갖추고 있으며, 법회 및 연수가 가능한 대규모 법당이 있다. 현재 템플스테이, 연수, 산림법회 등의 연수 신행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대광명전(大光明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대광명전(大光明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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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1758년), 보물 제1827호 대광명전은 중로전(中爐殿)의 중심건물이다. 대웅전(大雄殿) 서북쪽에 위치(位置)하며 건물의 규모나 목재 또는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대웅전 다음가는 우수한 건물로 평가 받고 있으며 1756년 10월 화재로 전소 된 것을 1758년 9월 중건하였다고 한다. 통도사약지(通度寺略誌)에 따르면 통도사 창건 당시에 초창하였다고 하며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대장경 400함 가운데 화엄경 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건물로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부에는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비로자나’는 광명의 빛을 두루 비춘다는 광명편조(光明遍照)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법계의 진리와 일치하는 부처이며,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이다. 불상 뒤편에 조성된 삼신불탱은 현재 원본은 박물관으로 이전되었으나, 조선후기 통도사를 기점으로 활동하였던 임한(任閑)스님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현존하는 삼신탱화 중에서 그 화격이 최고로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부에는 동. 남. 서 평방부에 화재를 막기 위한 묵서가 있다.

    吾家有一客(오가유일객) 定是海中人(정시해중인)
    口呑天藏水(구타천장수) 能殺火精神(능살화정신)
    이는 건물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화부적(防火符籍)으로 생각된다. 법당 내외에 조각된 목조비룡(木造飛龍)의 모습이 사실적인데 이는 조선시대에 발달된 목조공예의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것이다.

    탱화
    대광명전 삼신불탱화 - 보물 제1042호 조선(1759年), 마본채색(麻本彩色)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근본불교는 점차 교리가 발달함에 따라 기중생들의 요구에 응하여 다불관사상(多佛觀思想)이 발달하게 된다. 바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三世佛)이나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사상(三身佛思想) 등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화엄종(華嚴宗)의 삼신사상(三身思想)에서 유래된 삼신탱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에 모신다. 중앙의 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사찰에 따라서 보신불로 아미타불을 모시거나 비로자나불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삼신탱은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을 한 폭에 함께 그리기도 하고 이 작품처럼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리기도 한다.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릴 때는 좌우대칭의 효과를 주기 위해 통상적으로 등장하는 사천왕을 좌우 폭에 각각 2구씩 나누어 배치하는 등 이 밖에도 보살과 제자상, 신중상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좌우대칭의 효과를 주고 있다. 이 삼신불탱은 색채와 무늬가 화려하고 정교하며 구도 역시 좌우대칭의 효과를 잘 살린 훌륭한 불화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불화이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탱은 화면 중앙 상단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2분신불, 5보살, 제석천, 2제자, 북방 다문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의 2천왕, 2신중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키 모양 광배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지권인을 짓고 있는 본존불은 이목구비가 단정하며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감이 있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고 기다란 귀를 갖추었으며, 다자색 법의의 깃을 따라 연둣빛과 분홍빛깔의 보상화문이 장식되어 다소나마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불교에서는 불(佛)을 법신불(法身佛)ㆍ보신불(報身佛)ㆍ화신불(化身佛)의 삼신불(三身佛)로 나누고 있다. 초기불교에서의 불신(佛身)은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었으나 점차 교리가 발달하면서 삼신설(三身說)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러한 교리체계를 기본으로 하여 가로 3.15m, 세로 4.6m의 비단에 채색하여 삼신불(三身佛)을 세 폭에 각각 그린 이 삼신불탱은 원래 대광명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광명전에는 이를 모사하여 봉안하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주존인 비로자나불은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을 입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의 손모양인 지권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처럼 통견을 입은 노사나불은 양손을 위로 한 설법하는 모습의 손 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주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석가여래는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고,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노사나불과 석가여래의 아래에는 각각 2위(位)의 천왕이 있어 전체적으로 사천왕이 삼신불을 호위하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삼신불탱은 1759년(영조 35)에 임한(任閑), 하윤(夏閏), 옥상(玉尙), 수성(守性), 보관(普寬), 성익(成益), 상심(尙心), 약붕(若朋), 평인(平仁), 태일(太一) 등이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석가ㆍ아미타ㆍ약사여래를 삼신불로 표현하였는데 비해 이 삼신불도에서는 비로자나불ㆍ노사나불ㆍ석가여래로 삼신불을 표현한 드문 예로서 미술사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현재 보물 제10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후불탱(釋迦牟尼後佛幀)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중생들의 요구에 응하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화현(化現)해서 출가수행 끝에 성도하셨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또한 중생들의 근기(根氣)에 따라 제각기 수많은 형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 위에 앉아 마군(魔軍)들을 항복시키고 성도하시는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 비로자나불화의 오른쪽에 배치되는 이 불화의 인물배치와 구도는 노사나불화와 좌우 대칭으로 구성된다.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는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대개 우견편단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그 좌우로 6위의 협시보살들을 배치하고 있는데, 주로 문수, 보현보살이나 미륵, 제화갈라보살이 자리한다. 그 앞에는 각각 용과 보탑을 든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배치되며 그 밖에 다른 인물의 배치는 노사나불화와 동일하다.
    오늘날 전하는 삼신불탱화는 1759년(영조35)에 제작된 통도사 대광명전의 삼신불탱이 유명한데 구도와 표현, 채색기법, 선묘의 솜씨 등에서 조선후기불화를 대표할 만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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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자나후불탱(毘盧遮那後佛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해서 표현한 부처님이다. 진리는 마치 광명과 같아서 특별한 형상이 있을 수 없고 온 우주에 두루 편재(偏在)해 있는 청정무구 그 자체이므로 이 부처님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은 왼손의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는데, 이는 이(理)가 지(智)를 감싼 형태로 이(理)와 지(智)가 하나 됨을 의미한다. 통도사 대광명전의 삼신불은 가운데 다른 두 폭에 비해 큰 그림이 본존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여 14보살, 10대제자, 8부중, 용왕, 용녀 및 14분의 타방불을 그려 십방제불(十方諸佛)로 구성되어 있는 비로자나후불탱이다.비로자나후불도는 진리 당체인 청정법신의 비가식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대경으로 표현된 것이라 이해하면 좋겠다.

    이들 보살이외에 좌우로 제 보살들이 추가로 배치되는데, 이 보살은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법혜(法慧)·공덕림(功德林)·금강당(金剛幢)보살 등의 설주보살들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도 비로자나불화에는 상단부에 성문들이 가득히 묘사되지만 외호중인 사천왕과 팔부중은 배치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대일경소(大日經疏)에 “문수는 커다란 지혜이다. 가장 뛰어난 공(空)의 지혜로 보리심을 청정하게 하고 반야의 검(劍)으로 번뇌를 근원부터 자른다.”고 하였다. 이렇게 문수보살은 법왕자로서 현실세계에서 실천해 나가면서 법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중생을 인도한다. 보현보살(3)은 비로자나불의 덕을 상징하는데 보리심이 신(身)·구(口)·의(意)에 걸쳐 전개된다고 하였다. 관자재보살(4)은 무애자재하게 일체를 관찰하고 중생의 고뇌를 자재하게 꿰뚫어 보아 구제하신다. 『법화경』「보문품」에 “고뇌하는 무량한 중생들이 있어 일심으로 명호를 부르면 그 소리를 관하여 구제한다.”고 하여 관세음보살이라고도 불린다.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여래의 협시이다. 대세지보살(5)의 존명은 「커다란 세력을 얻은 자」라는 의미로 중생에게 보리심의 종자를 뿌리고 또한 능히 수호한다. 제장애보살(6)은 일체의 어려움을 조복시키며,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7)은 인과 이덕 (因果 二德)과 사지(四智)의 지혜를 구족하신 분이다. 미륵보살(8)은 자씨(慈氏)라 의역하며 장래에 반드시 성불할 것을 약속받고 있으므로 당래불·미래불이라고도 한다. 묘음보살(9)은 대자비심으로부터 묘한 법음을 가지고 중생에게 설법하고 인도한다.

    금강장보살(金剛將菩薩, 10)은 법신불의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지혜를 구체적으로 펼치시는 분이다. 허공장보살(11)은 허공처럼 광대한 지덕(智德)과 복덕(福德)을 갖추고 계신 분이며 보처보살(寶處菩薩, 12)은 온갖 소원을 구족시키는 여의보주를 삼매의 경지에서 산출하시는 분이다. 시무외보살(13)은 두려움 없는 법미(法味)를 베풀어 악취(惡趣)를 파하게 한다. 일광보살(14)은 번뇌의 먹구름을 제거하고 널리 중생에게 광명을 가져다주며 월광보살(15)은 일광보살과 함께 약사여래의 협시보살이다. 수행 중의 지혜를 상징하는 분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모습을 반월(半月)이 차츰 차가는 모양의 지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 뒤로 좌우에 부처님의 십대제자(가섭존자(16), 아난존자(17) ), 라훌라(18), 목련존자(19), 사리불존자(20), 수보리존자(21), 부루나(22), 가전연(23), 아나율(24), 우팔리(25)가 시립해 있고 법신불의 두광 좌우에 수호존인 용왕(26)과 용녀(27)가 있으며 역시 그 좌우에 팔금강(청제재금강(28), 백정수금강(29), 적성금강(30), 정제재금강(31), 벽독금강(32), 황수구금강(33), 자람금강(34), 대신금강(35) )이 외호(外護)를 하고 있다. 그 위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법신불의 지혜와 위덕이 항상함을 증명하는 십사화불(十四化佛)-(36), (37)이 현현해 있다.

    거의 모든 불화가 다 그러하기도 하지만 비로자나후불도는 특히 밀교적 요소가 강하게 배어 있다. 청정법계와 현상계, 즉 진리당체와 중생의 성불 가능성의 표현을 만다라적으로 장엄하게 구성하고 질서화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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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나후불탱(盧舍那後佛幀)

    보신(報身) 노사나불은 과보(報)의 몸(身)이란 뜻으로 원만무궁한 복덕(福德)을 상징한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세월동안 지어온 수 많은 행과 원으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이 부처님을 ‘원만보신 노사나불’ 이라고도 한다. 보신불의 대표격으로는 서원(誓願)을 세우고 정각(正覺)을 이룬 불로서 아무런 고통이 없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극락세계를 이룩한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들 수 있지만, 도상(圖像)으로 나타나는 상은 보관을 쓴 보살형의 노사나불이다. 노사나불의 수인은 두 손을 들어올려 설법인을 취하는데, 이는 중생들의 설법교화에 그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화에는 보관을 쓴 채 양 손을 어깨 위로 들어올려 석가세존의 최초 설법인을 짓고 있는 노사나불을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 크게 묘사한다.

    그리고 좌우 협시보살로는 비로자나불화와 마찬가지로 『화엄경』에 등장하는 문수, 보현, 법혜, 공덕림 등의 설주보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하부 전면에는 각각 비파와 보검을 든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을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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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광명전 신중탱(大光明殿 神衆幀) – 경남유형문화재 제279호

    신중(神衆)이란 고대 인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토속신이었으나 불교에 흡수되면서 불법을 옹호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신중탱은 대개 대웅전과 같은 주요 불전(佛殿)의 측벽(側壁)에 봉안되며, 신중을 모신 단을 신중단(神衆壇)이라고 한다. 신중탱은 종류가 다양하며 주로 무복(武服)을 입은 무사(武士)나 장사(壯士)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엄격한 도상(圖像)을 지켜야하는 불보살탱(佛菩薩幀)과는 달리 화사(畵師)의 의지에 따라 표정이나 자세가 달라진다. 따라서 신중탱은 불화를 그리는 사람의 기교와 감성이 가장 잘 표현되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좌측의 그림은 화면을 좌우로 구획하여, 각각 합장하고 있는 제석천(帝釋天)과 동진보살(童眞菩薩)을 중심으로 권속들이 배치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녹색과 붉은 색을 많이 썼으며, 곳곳에 당초와 연꽃 무늬를 세밀하게 그려 넣고 있다. 우측은 합장하고 서있는 4명의 천신(天神)과 팔금강(八金剛)이 상하 2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꽃형태의 두광을 지닌 팔금강의 활달하고 해학적인 표정을 통해 작가의 능숙한 필력을 엿볼 수 있다. 길이 238㎝, 폭 183㎝ 크기의 탱화로 8금강(金剛)과 8보살(菩薩) 등의 신중을 그린 것이다. 화면은 윗부분 왼쪽에 3금강이 묘사되어 있는데 가운데 있는 금강은 합장을 하고 있고, 나머지 두 금강은 검과 삼지창을 들고 있다. 4보살(천신)은 얼굴을 풍만하게 그려 넣어 원만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식적인 묘사에 그치고 있고, 다만 보관의 모양과 색깔을 차별하여 약간 다르게 표현하였다. 이 탱화는 원래 통도사 대광명전의 신중단에 봉안되었던 것인데 현재는 모사를 하여 봉안하고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1804년(순조 4) 화사인 계한(戒閑) 성인(性仁) 등이 그렸으며,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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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용화전(龍華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용화전(龍華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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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1725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04호
    용화전은 대광명전과 관음전 사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당시 창건주는 알 수 없으며 현재의 건물은 1725 년(영조 元年)에 청성대사(淸性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으며,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출현하실 미래불(未 來佛)이다. 그 부처님의 탄생하실 곳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이고 또 설법회상(說法會上)을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하므로 법당의 명칭을 용화전이라 하였다.

    전각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호분칠(胡粉漆)을 한 미륵불소조좌상을 봉안하였다. 독존(獨存)으로 모신 것으로 보아 고려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 동. 서측면 벽체에 모두 6회에 해당하는 ‘서유기(西遊記)’내용을 표현 하고 있는데 서유기가 사찰의 벽화로 그려진 것은 현존하는 유일한 예이다.

    탱화
    용화전 미륵후불탱(龍華殿 彌勒後佛탱)

    조선(1798年), 견본채색(絹本彩色), 183 × 172cm, 경남유형문화재 제420호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미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아 앞으로 출현하실 분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한다. 미륵불이 출현하는 시기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고 나서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이며, 이때까지 도솔천(兜率天)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따라서 미륵 부처님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실 곳은 용화수(龍華樹)아래 이므로 미륵불을 모신 법당을 용화전(龍華殿) 또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한다. 불화로 표현될 때는 미륵보살이 도솔천궁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미륵정토변상(彌勒淨土變相)과 용화수 아래서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의 미륵하생도(彌勒下生圖) 그리고 보관을 쓴 미륵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미륵내영도(彌勒來迎圖) 등 세 가지 형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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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봉발탑(奉鉢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봉발탑(奉鉢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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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 471호

    봉발탑은 용화전 앞에 서있는 것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가사와 발우를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ㆍ가운데ㆍ윗부분으로 구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 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전체 높이는 약 230cm이고, 현재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2미터 높이의 발우(鉢盂)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인데, 이를 봉발탑(보물 제471호)이라고 하며 이는 탑이 아니고 발우이다.

    이 석조물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부등형(不等形) 8각 간석(竿石)을 세우고 간석 위에 상대석(上臺石)을 놓았으며 그 위에 뚜껑을 갖춘 발(鉢)을 올려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석등(石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석등의 화사석(火舍石) 위치에 발이 놓여 있어 특이하다. 이 석조 봉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우(鉢盂)를 미래세(未來世)에 출현하실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伽葉尊者)가 발우와 함께 가사(袈裟)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석조 발우는 꼭 같지는 않지만 보은(報恩)의 법주사(法主寺)경내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 머리에 이고 있는 석조발과 같은 형식으로 보인다.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관음전(觀音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관음전(觀音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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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1725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1호
    영조 원년(1725)에 용암대사(龍岩大師)에 의하여 초창되었고, 그 이후의 중수 사실은 알지 못하며 근래에 기와를 개수(改修)한 법당이다. 건물 형태는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법당 앞에는 높이 약 3m에 달하는 석등이 있으며 조성 시기와 조각양식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과 비슷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내부 벽면에는 보타락가산에 계신 관세음보살에게 남순동자가 법을 묻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32응신을 상징하는 여려 모습의 관세음보살을 표현하였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픔에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당할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관하고 곧 해탈하게 하느니라.”라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에서 보이듯이 관세음보살은 시방 국토에 32응신을 나투어 중생을 구제해 주는 대자대비하시고 원력이 바다와 같이 깊으신 보살이다. 관음신앙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신봉하고 있으며 다른 법당에 비교해서 발 디딜 틈 없이 불자들이 많이 찾는 전각이다.

    탱화
    관음전 후불탱 관세음보살도(觀世音菩薩圖)


    통도사 관음전의 후불탱화도 1858년에 조성된 것으로, 본존인 관세음보살에 비해 양 협시인 남순동자(南巡童子, 또는 善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은 작게 그려져 관세음보살님의 위의가 한껏 강조되어 있다. 해안고절처에 기암괴석과 반석을 배경으로 왼쪽 무릎을 세우고 백의(白衣)를 걸친 관세음보살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이 본사(本師)로 삼고 항상 모신 다고 한 아미타부처님이다. 백의는 대비의 공덕을 모두 갖추고 널리 중생을 교화함을 상징한다. 오른쪽 아래에 합장하고 서 있는 남순동자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근거하여 묘사한 것이며, 왼쪽에 시립해 있는 해상용왕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이 바다 와 같이 깊고 넓음을 증명하고 있다. 정병에는 불사(不死)의 감로수가 들어 있고 버들가지는 어리석음과 번뇌, 미망(迷妄)을 제거하고 중생의 마음에 뿌린 보리심의 종자가 지닌 각종의 공덕을 상징한다. 청죽은 화엄법사 의상대사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청죽의 표현은 다른 나라의 관음탱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모습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의 우측상단에는 채운(彩雲)과 함께 관음조(觀音鳥)가 날고 있으며 바다로 부터 솟아오른 기암고절처는 정교한 준법에 청록산수로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회화적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관음탱화는 이와 같은 도상형식을 통하여 대비삼매에 머무르며 천수천안(千手千眼)으 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자비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의 서원을 시각적으 로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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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련 : 관음전(觀音殿)
    一葉紅蓮在海東 일엽홍련재해동한떨기 홍련이 해동에 있으니
    碧波深處現神通 벽파심처현신통푸른 파도 속에 신통을 나투네.
    昨夜寶陀觀自在 작야보타관자재엊저녁 보타산의 관자재보살이
    今朝降赴道場中 금조강부도량중오늘아침 도량 중에 강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