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본문 바로가기
싸이룩스 불교 :: CYLOOKS BUDDHISM
카테고리 Hot
전체보기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탑전(塔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탑전(塔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768_93.jpg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도사 남쪽 남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남산 정상에는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탑전은 이 석탑을 예배하기 위한 공간으로 건립된 것이다.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오층석탑(五層石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오층석탑(五層石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684_91.jpg
     

    수백년 전부터 노출된 기단부와 부서진 석탑부재들이 흩어져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다가 월하종정스님의 교시에 따라 1991년에 지금과 같이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원형복원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결실된 4, 5층 옥개석 및 탑신석을 새로 만들었고, 특히 1층 탑신석은 발굴된 부재를 옛 그대로 써서 감실을 지닌 석탑으로 복원 하였다. 또한 본래의 사리공 안에는 경주 황룡사 목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출현한 불사리 2과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이운하여 봉안하였다. 이 사리는 자장율사께서 당나라로부터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로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와 동시에 모셔온 것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이룬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면적은 탱주의 표현 없이 우주만을 모각하여 갑석과 동조하였다. 1층 탑신괴임은 원래의 부재를 사용 하였고, 1층 탑신 남면에 인왕상 2구, 2층 탑신 남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2개의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곳의 석탑은 그 유래가 자세하지 않으나 노출된 기단부의 사리공과 옥개석 등으로 보아 나말여초의 귀중한 석탑으로 추정된다.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설선당(說禪堂)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설선당(說禪堂)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580_79.jpg
     

    불교대학 수업, 주말 철야정진, 템플스테이 등의 교육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해장보각(海藏寶閣, 불교대학 & 도서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해장보각(海藏寶閣, 불교대학 & 도서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535_04.jpg
     

    해장보각이라는 이름은 경전이 용궁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인도 고대의 전설을 따서 지은 것이라 하며, 또한 대장경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와 같이 무궁무진하다는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방대한 경전과 자료들의 무한가치가 해장보각이라는 현판의 의미에 걸맞다 할 것이다.
    사찰 도서관은 여타 공공 도서관과는 달리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목적과 봉사 대상을 가지고 있다. 즉 사찰 도서관은 불교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자료들을 이용하여 불자님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신행 생활을 조력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곳 도서관의 장서 규모는 그동안 통도사를 거쳐 간 여러 스님들이 꾸준히 이용했던 손때 묻은 자료와 관심 있는 분들의 기증으로 25,000여 권의 자료들을 비치하고 있다. 또한 새로이 마련된 전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소장 자료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함으로써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대출과 반납 및 이용자 관리 등 각종 통계를 컴퓨터의 간단한 키보드 조작만으로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무엇보다 편리해진 것은 찾고자하는 자료의 소장 유무와 찾고자하는 자료가 없다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내용의 자료들을 쉽게 검색할 수 있게 된 점이라 할 것이다. 각종 소장 자료들의 형태에 있어서도 책자형 인쇄 매체 이외에 다양한 정보 욕구와 변화하고 있는 이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큰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경 독송, 불교 방송의 유익한 내용들을 녹음한 오디오, DVD, 비디오테이프, TV 등 각종 시청각 자료들도 3,000여 점을 비치하게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불자님들의 수행 정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컴퓨터를 갖추어 사찰을 찾는 불자님들이나 내방객에게도 메일을 점검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각종 필요 정보들을 자유롭게 검색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실을 마련한 것 등의 몇 가지 변화들은 최근 눈에 띄는 도서관 활성화 시책의 가시적 성과들이라 하겠다. 더욱이 지금까지 사중 스님들에게만 제공되어 왔던 도서관 자료들을 완전히 개방하여, 통도사를 찾는 불자님들이나 지역 주민 또는 내방객들에게도 문호를 활짝 열어두고 있다.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시탑전(示塔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시탑전(示塔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467_96.jpg
     

    시탑전(侍塔殿)은 통도사 동남쪽 월영교 건너에 자리한 정면 11칸, 측면 7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재 원로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부도원(浮屠院)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부도원(浮屠院)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412_72.jpg
     

    양산 통도사 부도 , 경남 유형문화재 제585호

    통도사 경내 아래쪽에 마련된 주차장에서 개울을 건너면 남향한 터에 자리한 부도원을 만난다. 이곳은 통도사의 역대 고승들의 사리탑과 탑비를 봉안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부도와 탑비들은 원래 통도사 주변과 산내암자에 흩어져 있던 것인데, 1993년 가람을 정비하면서 모두 이곳으로 이전하여 부도원(浮屠院)으로 조성한 것이다. 현재 부도원에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 60여 기와 탑비 및 중수비ㆍ공덕비 등 석비(石碑)가 60여 기가 즐비하게 줄지어 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석당간(石幢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석당간(石幢竿)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858_43.jpg
     

    경남유형문화재 제403호


    통도사 부도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석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된 것이다. 지주석(支柱石)은 당간(幢竿)과 함께 조립하였으나, 지상에 노출된 부위만 가공된 상태이고 표토 부위에서부터 지하 2m 가량 묻힌 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 중수 시에 개수ㆍ보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탑의 기단부와 같이 장대석을 놓아 사방의 하대 윤곽을 잡은 다음 다시 간격을 좁혀 조금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기단석 양쪽(남북)에 지주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有溝)가 있다.
    그리고 지주석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2개의 간공(竿孔)을 만들고, 동서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한 다음 다시 중앙에 간대(竿臺)를 놓고 당간(幢竿)을 세웠다.  당간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석당간은 원래의 형태는 아니고 후대에 보수하면서 다소 변형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당간이 현존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으며 제작시기는 기단의 구조나 지주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된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총림문(叢林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총림문(叢林門)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309_88.jpg
     

    부도원을 지나서 바로 나오는 문이다. 월하스님께서 쓰신“영축총림”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총림의 사격과 사찰의 시작을 표방한 총림문(叢林門)이라 하겠다.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422f49f7395448dc71f5b7fe81fb53c8_1714815223.jpg
     

    보물 제74호

    통도사에서 약2km 떨어진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35번국도 도로변에 서 있다.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의 하나로, 절의 동남쪽 약 4㎞지점에 거친 자연석면 그대로 서있다. 이 절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며, 국장생이라는 명칭은 나라의 명에 의해 건립된 장생이라는 의미이다.

    장생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고 있어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장생은 경계표와 보호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제작된 것으로,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다는 글이 이두문이 섞인 금석문으로 새겨져 있어 국가와 사찰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통도사(通度寺) 국장생(國長生)은 4만 7천보(步)나 되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진 장생표(長生標)의 하나이다.

    통도사 동남 약 4.4km에 위치한 이 석표는 사찰장생의 대표적인 예로서 사찰의 경계(境界), 풍수(風水), 방액(防厄)을 위한 장생석표로서 전면의 명문(銘文)은 자경(字經) 약 5∼9cm의 음각된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고, 형태는 거친 자연석의 전면을 막다듬하여 곧추 세운 것이다. 커다란 자연석(화강암)을 약간 다듬어 만들었으며, 높이는 1.67m, 폭은 60Cm로서 아래의 둘레는 2.2m이다.

    남북으로 향한 옆면에는 철정(鐵釘)으로 거칠게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꼭대기에는 무엇인가 매단 흔적으로 생각되는 3개의 파여진 홈이 보인다. 동쪽면 아래에는 총알 자국이 있으며, 넓적한 돌받침대 위에 남북(南北)을 옆면으로 하고, 넓적한 면을 동서로 한 이 석표가 세워져 있으며, 5m 동쪽에는 또다른 조그만 선돌이 세워져 있다. 바닥에 깔려진 받침대와 선돌에도 각각 한문(漢文)이 새겨져 있다.

    석표에 쓰여진 내용(內容)은 "통도사 손내천 국장생 일좌(一座)는 절에서 문의(問議)한 바,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을축년(乙丑年) 5월의 통첩(通牒)에 있는 이전의 판결(判決)과 같이 다시 세우게 하므로 이를 세운다."로서 제작연대(製作年代)는 고려(高麗) 선종(宣宗) 2년(A.D. 1085)으로 알려져있다.

    비문의 내용은 "통도사 손내천 국장생 일좌(一座)는 절에서 문의한 바 상서호부(尙書戶部)에서 을축년(乙丑年) 5월의 통첩에 있는 이전의 판결과 같이 다시 세우게 하므로 이를 세운다"는 것으로 나라에서 통첩을 받아 명에 의해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는 고려(高麗) 선종(宣宗) 2년(1085)이고 높이는 167cm, 폭은 60cm이다.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자장율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자장율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bc7c92cb5b1b9f9677661e234d392e37_1714751336_75.jpg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신라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으므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의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고 기도를 올리며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불교의 지도자로 만들겠습니다.”하는 축원 끝에 그의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더니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었다. 부처님과 같은 날에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20대 초반에 논과 밭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불가에 귀의한 후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그는 방안을 가시로 둘러 움직이면 가시가 찌르도록 하였고,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물리치는 고골관(枯骨觀)이라는 엄격한 수행(修行)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이처럼 그의 피나는 고행은 계속되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수행중인 자장을 대신(大臣)의 자리에 오르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거절에 화가 난 왕은 조정의 관리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칙사에게 준 자장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破戒)를 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스님의 단호한 답변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확인 시켜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항상 공부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신라는 본격적으로 불교사상이 유입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자장율사는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終南山)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五臺山 : 一名 淸凉山)에 머물렀다. 스님이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명상하다 꿈에 문수보살이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주었는데 해독치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이 자성 없는 줄을 요달해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 하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으셨던 가사(袈裟)와 부처님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舍利) 그리고 발우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이후 자장율사는 더욱 수행을 깊이 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는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여 나라의 존망에 까지 직면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율사에게 소환을 명하여 이듬해, 자장율사는 당태종이 선사한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신라에 돌아온 것이다(643).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그를 궁중으로 초청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7일 주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이면 여덟, 아홉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고자 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은 자장율사의 피나는 구법(求法)노력의 결과이며, 거기에는 철저한 자장스님의 계율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귀국 후, 스님 중 최고 자리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 자장율사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자장율사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한다.

    또한 자장율사의 불교사상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스님의 한결같은 믿음으로 신라땅을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당나라로의 유학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통하여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의 후원아래 구법의 길을 떠나 입당하여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당시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율사(律師)로 이름나 있다. 자장율사의 탄생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보다는 연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자장율사는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조성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등, 곳곳에 신라의 땅이 과거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곳 통도사도 창건하게 되었고 불국토인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삼국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 신념에 찬 결단이었다. 이처럼 자장율사의 사상적 구심점은 바로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과 계율근본도량인 통도사 금강계단의 건립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즉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서 신라사회와 모든 불교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통도사와 신라 최대의 거찰 황룡사를 형제 사찰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장율사보다 먼저 영축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낭지화상은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화엄경(華嚴經)』에도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 五臺山)에 구름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한다. 그는 사미시절의 원효스님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자장율사도 낭지화상과 같은 동년배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낭지화상과 교류하였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