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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 金山寺 彌勒殿 Maitreya Hall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06
금산사 미륵전(국보 제62호) 金山寺 彌勒殿 Maitreya Hall-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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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부처님이 불국토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현재의 미륵전 전각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수문守文대사가 다시 지은 뒤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3층 불전으로 1·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각층마다 다른 현판이 걸려 있는데,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의 현판이 걸려 있다. 미륵전의 내부는 3층 전체가 뚫려 있는 통층이다. 중앙에 거대한 미륵삼존불상을 모셨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협시보살 좌우에는 언제 봉안하였는지 모르는 또 다른 것이 2구가 있다. 본존의 협시보다 약간 작지만 역시 금을 입힌 소조상이다.
미륵전 법화림보살입상 복장유물 彌勒殿 法花林菩薩立像 腹藏遺物 Excavated Relics of Bodhisattva of Maitreya Hall<조선 후기 후령통 높이 14.2, 지름 9>
미륵전 안에는 미륵불과 좌우보처로 법화림보살法花林菩薩과 대묘상보살大妙相菩薩像이 모셔져 있다. 미륵삼존불은 미륵전과 함께 정유재란 이후에 다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본존불은 일제강점기 때 실화로 소실되어 1938년 석고로 다시 조성된 것이다. 두 협시 보살상은 높이 8.79m로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대형 상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조화로운 신체비례를 보여주고 있다. 연꽃과 화염보주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팔찌와 가슴 양쪽의 천의 매듭에 화염보주형 장식을 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2006년 7월 법화림보살상의 등에서 흙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오랜 장마로 법화림보살상의 미세균열 부위가 습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보존처리 과정에서 보살상 내부에서 복장 유물이 수습되었다. 보살상의 정확한 제작시기나 제작자를 알려줄 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후령통과 직물류, 산호·호박 등의 보석류 등이 확인되었다.
<보석과 오곡>
미륵전 벽화 彌勒殿 壁畫 Mural of Maitreya Hall, 조선 후기
금산사 미륵전에는 내·외벽에 벽화로 화려하게 장엄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풍화로 인해 박락이 진행되어, 2009년부터 미륵전 벽화에 대한 보존처리가 이루어졌다. 훼손정도가 심한 2·3층 포벽 및 간벽 벽화는 보호틀 설치 후 벽에서 분리하여 보존처리 후 따로 수장하고 있다. 미륵전에는 건물 규모가 큰 만큼 많은 수의 벽화가 존재한다. 총 187점의 벽화가 확인되며, 벽화의 주제도 매우 다양하다. 불보살을 비롯하여 천인상, 나한상 등이 주로 등장하며, 또 일반 화훼, 화조도 및 산수화도 그려졌다. 바탕을 황토색으로 칠하고 석간주로 굵은 외곽선을 긋고, 분선分線과 묵선墨線으로 내곽선을 그은 다음 그 안에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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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金山寺 五層石塔 出土 舍利莊嚴具 Geumsansa Temple Stone P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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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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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金山寺 五層石塔 出土 舍利莊嚴具 Geumsansa Temple Stone Pagoda-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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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 母嶽山 金山寺 五層石塔 重創記〉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중창기에는 금산사 오층석탑의 조성시기와 중건 상황 및 관련 인물 등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던 조선 전기 금산사의 역사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동제사리합과 작은 합 2점, 청동오층탑과 엽전 7점, 그리고 불상 8구와 동자상 1구 등의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조선 초기 사리장엄구의 구성과 특징을 잘 보여준다.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에는 조선 초기의 불사 진행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사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다량의 불상, 규모와 작품성이 뛰어난 많은 불상들이 발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금산사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金山寺 五層石塔 出土 舍利莊嚴具 Sarira Reliquaries from Five-Story Stone Pagodaat Geumsansa Temple
조선 1492년, 금산사 성보박물관
금산사 오층석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탑 안에서 「모악산 금산사 오층석탑 중창기母嶽山金山寺五層石塔重創記」와 각종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중창기에는 금산사 오층석탑의 조성시기와 중건 상황 및 관련 인물 등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이는 공백으로 남아 있던 조선 전기 금산사의 역사를 메워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동제사리합과 작은 합 2점, 청동오층탑과 엽전 7점, 그리고 불상 8구와 동자상 1구 등의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조선 초기 사리장엄구의 구성과 특징을 잘 보여준다.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에는 조선 초기의 불사 진행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사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다량의 불상, 규모와 작품성이 뛰어난 많은 불상들이 발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불교신문 기사발췌>
[사찰성보문화재 50選] ②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2021.01.20), 불교신문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금산사, 조선 팬데믹 돌파할 ‘이상세계’ 꿈꿨나
오층석탑 일괄 사리장엄구는 조선전기 금산사 생생한 역사, 해제수리과정 알 수 있는 자료, 작품성 뛰어난 많은 불상 눈길
진표율사 미륵전 조성하면서 미륵신앙 중심도량으로 주목
여러 이적 보인 중창불사 참여, 많은 대중이 희망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인생 고단함보다 즐거움 많아지길 간절히 염원
코로나 팬데믹이 몸과 마음을 가둔 요즈음, 불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를 그려본다. 그 세상은 깨끗한 물이 흐르며, 아름다운 꽃이 핀다. 유리와 같이 평평하고 꽃과 향으로 뒤덮여 있는 땅, 그 곳에 사는 인간은 키는 16장에, 수명은 8만4000세나 된다. 그들은 복덕이 많고 지혜를 갖추어 근심과 걱정이 없다. 바로 미륵부처님이 강림한 용화세계의 모습이다.
현재는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므로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한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세 번에 걸쳐 법회를 연다. 그에 따라 첫 번째는 96억인이, 두 번째 94억인이, 세 번째에 96억인이 각기 아라한과를 얻는다. 이것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이다. 이 미륵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삼국의 불교 전래와 더불어 널리 신봉되었다.
미륵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은 어디일까.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예로부터 신성시되던 모악산 서쪽 자락에 금산사가 위치해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진표율사의 주석 이후이다. 금산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이다. 진표율사는 미륵전과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방등계단(戒壇)에서 수계를 주어 불교교단을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에도 혜덕왕사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미륵신앙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미륵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불타고 폐허가 된다. 임진왜란 때 처영(處英)대사와 영규(靈圭)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의승군 전투에 참여하여 큰 승리를 이끌었다. 이에 대한 왜군의 보복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 금산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유물이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로 금산사 방등계단 앞에 위치한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1971년 이 탑의 보수를 위해 해체하는 작업에서 탑 안에 봉안되어 있던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일괄 사리장엄구에는 조선 전기 금산사의 역사적 상황, 해제수리하는 불사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 다량의 불상, 더구나 규모와 작품성이 뛰어난 많은 불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리장엄구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금산사 방등계단 앞 오층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 중 일부. 청동오층탑>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母岳山金山寺五層石塔重創記)>와 불상 8구, 동자상 1구, 역사상 1구, 그리고 청동오층탑과 엽전 7점, 동제사리합과 작은 합 두 점이다.
‘오층석탑중창기’(길이 195.5cm)는 1492년(성종23년) 탑을 중창할 때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금산사의 과거와 중창 당시 불사의 과정, 탑의 조성시기와 시주자 등 중요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금산사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이다”라고 시작하여 진표율사가 삼층미륵전과 장육삼존을 조성한 사실을 적고 있다.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퇴폐해진 설법전과 여러 전각, 요사 10여 채를 세조왕의 뜻에 따라 경진(庚辰, 1460)년에서 신사(辛巳, 1461)년 사이에 보수하여 단청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492년(성종23년) 9월15일에 시작해서 9월25일까지 즉 약 10일간 해체공사 당시 상황을 잘 담고 있다. 탑을 해체하자 이상한 향기가 솟구쳤으며, 미륵전 장육상이 땀을 흘렸고,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차 있었다고 한다. 또한 탑 안에는 옛날에 봉안한 석가여래사리 5매와 정광여래사리 2매가 있었는데, 정광여래 사리가 분신하여 모두 3매가 되는 분신사리 이적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기적을 일으킨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서 만인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탑에 봉안할 사리장엄구를 탑의 해체 이후 약 50일간 준비하여, 11월15일, 탑에 매납하였다. 이 때 료명, 학유스님이 원불(願佛)을 조성하여 함께 탑 안에 넣었다고 중창기는 전하고 있다.
중창기의 끝부분에는 탑이 979년(고려 경종4)부터 982년(성종 원년)까지에 걸쳐 조성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시주자에 대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조의 서자인 덕원군을 비롯하여 직책과 이름을 함께 적은 8명과 조성에 참여한 인물들 21명이 등장한다. 말미에는 사찰의 대중 200여 명이 함께 참여하였다고 하니, 금산사 오층석탑의 중창불사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세조를 극진히 모셨던 덕원군은 1472년 회암사에 불공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사대부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던 인물이다. 성종이 비호하여 화를 면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그는 회암사와 원각사 등 여러 사찰의 법회에 참여하였으며, 직접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勸善文)을 쓰는 등 여러 불사에 재정적 지원을 한 독실한 불자였다.
성종대는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체계가 확립된 시기이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불교억압책과 함께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도 일부 견지하였다. 성종대에 대규모로 금산사 중창불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왕실의 지원도 있었지만, 사찰에서 신행조직을 결성하여 중창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노력이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이다.왜 탑에 불상을 봉안했을까
그러면 왜 탑 안에 불상을 봉안하였을까. 우리나라 석탑 안에 불상을 봉안한 전통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예처럼 통일신라시대부터이며,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불상들은 전각에 모시는 불상과 마찬가지로 불복장을 모두 갖추어 탑 안에 봉안되었다. 탑을 법신인 부처님이 상주하는 공간으로 인식한 것이다.
발견된 상은 불상 8구, 동자상 1구, 역사상 1구이다. 이 상들의 규모는 작게는 5cm에서 크게는 30cm에 이르는데, 30cm 크기의 불상이 탑 안에서 발견된 사례는 드물다. 조성시기도 통일신라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 불상은 탑의 조성시기인 고려시대, 이후 중창시기인 조선 전기, 혹은 그 이후에 납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의 사리장엄구 봉안은 불상의 불복장과 마찬가지로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다. 예경하는 부처님을 조성하여 탑에 봉안하면서, 이러한 공덕으로 극락정토의 왕생과 현세의 안녕을 염원하였던 것이다.
전소되기 이전의 금산사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것이 남아 있다. 바로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지은 시이다. 그는 생육신 중 한 사람으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이후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스님이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다양한 종류의 글을 남겼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안(洞府)이 널직한데/ 엉킨 수풀 깔린 돌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 우레 석단(石壇)을 도는구나// 낡은 짐 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추위 생기누나// 초제(招提, 여러 곳에서 모여 오는 스님네가 쉬어가게 마련한 집)에서 홀연히 하룻밤 자고나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구나.
이 시는 마치 미륵부처님이 당시 절망에 빠진 중생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듯이, 별들이 금산사를 밝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미륵부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했던 금산사! 여러 이적을 보였던 금산사 오층석탑의 중창불사에 참여했던 많은 대중들이 희망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이 고단함보다 즐거움이 많아지기를 염원해본다. 희망의 신앙이었던 미륵부처님의 도량, 금산사에서 이러한 마음은 더 간절하다.
[불교신문3646호/2021년1월20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방등계단 (보물 제26호) 金山寺 方等戒壇 Ordination Plat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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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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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방등계단 (보물 제26호) 金山寺 方等戒壇 Ordination Platform-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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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경내 가장 높은 곳인 송대松臺에 오층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계단戒壇이다. 매우 넓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석종石鐘형의 탑이 세워졌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방등方等은 위·아래 사방으로 평등하다는 뜻으로 방등계단은 스님과 재가신자를 가리지 않고 대심大心을 가진 이는 누구나 수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계단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난간 네 귀퉁이마다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다. 석종형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석종 주변으로 연꽃무늬를 둘렀다. 석종의 꼭대기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방등계단은 조각 수법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중창하고 해마다 단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어 방등계단의 원형은 진표율사까지 올라간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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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육각다층탑(보물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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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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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육각다층탑(보물 제27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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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노주 (보물 제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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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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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노주 (보물 제22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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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 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 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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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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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석등 (보물 제828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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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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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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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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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혜덕왕사 소현(1038-1096)은 고려시대의 고승으로 금산사의 중창주이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의 제자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096년 12월 18일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 숙종은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여 탑비를 세웠다.
글씨는 구양순법의 해서로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왕사의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과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이다. 그리고 음기陰記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명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8백여 명에 이른다. 이 비의 음기는 고려시대 스님의 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예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 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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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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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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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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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석련대 石蓮臺 (보물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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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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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석련대 石蓮臺 (보물 제23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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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대장전 (보물 제8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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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대장전 (보물 제827호)-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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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 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 인명창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 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 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금산사 대장전 꽃살문 >
금산사 대장전의 문살은 솟을빗꽃살문 형식이며, 문살이 교차하여 형성된 육각형의 영역 안에 꽃잎이 여섯 장인 관념적인 꽃을 새겼다. 붉은색, 푸른색, 흰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었으며 같은 색의 꽃들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수미단 백로>
금산사(金山寺) 대장전의 수미단에 조각된 백로이다. 건물의 내부를 보면, 천장은 중앙 1단을 높여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보상화문(寶相華文)으로 단청을 하였다. 전면의 수미단(높이 1.07m, 전면길이 4.0m, 측면 1.8m)은 4단으로 구획하여 정교한 장식문양을 투조(透彫)하였다. 바닥부터 제1단에는 용과 귀면 등이, 제2단에는 인물상과 꽃들이, 제3단에는 새와 꽃들이, 제4단에는 안상문이 각각 투조되었다. 특히 해오라기는 불단 정면 중앙부의 제3단에 새겨져 있다. 해오라기, 즉 백로는 길상적인 의미로는 일로(一路)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한 번에 순탄하게 급제함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