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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우운당 진희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우운당 진희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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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불종찰략사(佛宗刹略史)'에 따르면, 경기도 출신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언제 어떻게 통도사에 주석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소요 태능(逍遙 太能, 1562~1649)의 문도로 알려져 있다. 우운당의 가장 큰 불사는 1641년(인조19년)에 임진왜란 때 전소된 대웅전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한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을 중건한 우운스님은 대웅전 불사를 하고 남은 경비로 낙(落雲)스님과 함께 힘을 모아 1650년(효종1년)에 취운암을 창건하였으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1652년(효종3년)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였다. 통도사의 핵심인 금강계단 수리에는 우운당의 각별한 관심과 지도가 있었던 걸로 보이며 그가 지니고 있었던 계단(戒壇)에 대한 관심은 통도사 사리에서 분사리 된 대구 용연사 계단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중수한 우운당이 착수한 다음 사은 불교목판의 판각과 간행이었다. 통도사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다. 따라서 계단의 중수에 이은 불경의 간행은 통도사의 정신을 복원하는 필연적 절차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18세기 몇 차례의 화재로 통도사 경판이 소실되어 우운당이 간행한 경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우운당은 전란으로 없어진 법당 내의 불기들을 제작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674년(현종15년)에 제작된 은입사 향완이다. 이 향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은입사 향완 가운데 가장 크며 예술적으로도 아름다워 보물 제1354호로 지정되었다. 또 이듬해인 1675년(숙종1년) 통도사 대웅전의 건립과 계단의 복원, 또 석가여래 친착가사의 전래를 담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을 중간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현재 남아있는 문헌이나 금석문이 확인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더 많은 불사에 관여했다고 여겨진다.

    통도사를 전성기 때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진력한 우운대사가 1694년 입적한다. 통도사의 사부대중은 스님의 법구를 다비하여 정골사리(머리뼈사리)2과와 진신사리 9과를 얻었다. 이에 정골사리는 통도사에 모시고 진신사리 9과를 9곳으로 나누어 각각의 지역에 스님의 부도탑을 세우게 하였다. 우운당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웅전과 금강계단의 중건→경전의 간행→법당 불기의 제작→통도사 사적약록의 완성까지 임진왜란 이후 폐허화 된 속에서 체계적이고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우운당의 행적은 폐허가 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2번째 창건이었다고 정의 할 수 있다.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설송당 연초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설송당 연초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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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승려로 호는 설송(雪松), 성은 백(白)씨, 자인현(慈仁縣;경북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1688년(숙종14년) 13세에 청도 운문사로 출가하여 내전(內典)을 두루 섭렵하여 그 근원을 깊이 탐구하고 묘리를 체달하여 나갔다. 강석에 등단할 적이면 배우는 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설송당은 처음에 석제(釋霽)를 스승으로 섬기고 뒤에 환성 지안(喚醒 志安)에게 참학하였다. 이 두 스승의 법을 함께 전해 받고, 청허 휴정 이후 갈라졌던 두 파를 하나로 통합하였다. 즉 유정(惟政), 응상(應祥), 쌍언(雙彦), 석제(釋霽)로 이어지는 교파(敎派)와 언기(彦機), 의심(義諶), 설제(雪霽), 지안(志安)으로 이어지던 선파(禪派)를 하나로 통일시켰다고 한다. 만년에는 뒤따르던 학인들을 사절하고 올연히 면벽참선하다가 하루는 시자를 불러 차 한 잔을 끓여 마신 뒤 게송을 쓰고는 천화하였다. 그때가 1750년(영조26년,丙辰) 5월 1일 세수75세, 법랍63년이었다. 다비한 뒤 사리 8과를 얻었는데 통도사와 운문사에 나눠 분장했다. 4년뒤 이천보(李天輔)가 지은 비가 운문사에 세워져서 오늘날에도 운문사와 통도사 두 곳에 스님의 부도가 전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비문에 “정(定)이 곧 지혜요, 지혜는 곧 정(定)이니 선교(禪敎)를 논하지 말라. 도에는 동정(動靜)이 없어 마치 달그림자 물에 비치듯 동서(東西)가 분조(分照)하니, 오직 스님의 심법(心法)은 이문일종(二門一宗)이라”고 찬하여 스님의 본래 면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낙운당 지일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낙운당 지일대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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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성해당 남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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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성해당 남거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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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4년 6월 7일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기장의 장안사로 출가. 취룡 태일(鷲龍泰逸)스님을 은사로, 해령(海嶺)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0년 뒤인 1880년부터 은사를 따라 통도사에 주석하게 된다. 이듬해 1892년 조선조 이후 끊어진 계맥을 이은 당대의 율사인 만하승림(萬下勝林)스님에게 대소승계(大小乘戒)를 수지, 눌암(訥庵)스님 문하에서 대교(大敎)를 마쳤다. 이후 화두를 들고 참선 정진했다. 39세(1892년)에 통도사 승통(僧統)에 취임해 사격(寺格)을 일신하였고, 51세(1904년)에 통도사 총섭(總攝)이 됐다. 1906년 황화각(皇華閣)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원장 소임을 보면서 1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그 가운데, 황화각과 동곡루(同穀樓)를 중수했으며, 1911년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보수할 때 총지휘를 했다. 61세 되던 1914년에는 보광선원(普光禪院) 원장이 되어 납자들을 지도했고, 1927년(정묘년) 음력 12월29일 자시(子時)에 열반했다. 장례는 3일장으로 거행됐다. 제자 경봉은 은사의 열반을 다음의 시로 기렸다.

    劫前有樹本無影(겁전유수본무영) 공겁전의 본래 그림자 없는 나무가
    偶得春風現世眞(우득춘풍현세진) 우연히 봄바람 만나 세상에 나왔네
    莫問吾師歸去處(막문오사귀거처) 스승의 돌아간 곳 묻지 마라
    靈光空寂是靈眞(영광공적시영진) 신령한 광명 공적한 것이 이 영진일세

    또한, 한암스님은 경봉스님의 청으로 영찬(影讚)을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聖海大和尙影讚(성해대화상영찬)
    勤護三寶(근호삼보) 부지런히 삼보 수호하기를
    一片赤心(일편적심) 일편단심 이었네
    參尋祖意(참심조의) 조사의 뜻 참구하여
    透脫古今(투탈고금) 고금을 꿰뚫었네
    來耶去耶(내야거야)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明月胸襟(명월흉금) 밝은 달 흉금일세
    靈鷲山屹(영축산흘) 영축산 높이 솟고
    洛東江深(낙동강심) 낙동강 깊으노라

    세수 74세. 법납 58세. 碑(비)는 통도사 부도전에 봉안돼 있고, 문하에 구하천보(九河天輔, 1872~1965). 재하법성(齋河法晟).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경하달윤(鏡河達允)이 있다.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구하당 천보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구하당 천보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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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의 고승. 호는 구하(九河), 자호는 축산(鷲山),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출생했다. 구하 천보(九河 天輔·1872∼1965)스님의 부친은 김한술(金漢述) 선생. 본관은 경주. 모친은 신씨(申氏)였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이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출가를 하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이때가 1884년 겨울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경월도일(慶月道一)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듬해인 1890년 예천 용문사에는 용호해주(龍湖海株)스님 문하에서 경학과 참선을 공부하고 1896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성해남거(聖海南巨)스님의 전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았다. 수행을 거듭하여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오도의 경지를 맛본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1934년)를 설립하여 교감ㆍ교장을 역임하면서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통도사 주지로서 1910년 한일합방 후 30본산 주지가 되었으나 사규가 점차 무너짐을 보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1919년 무렵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통도사의 재정으로 군자금을 지원했는데,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원, 경성 「화신공보」 사장 초월동조(初月東照)에게 2천원, 지암 종욱(鍾郁)이 군자금을 모집할 때 3천원, 독립운동가 정인섭에게 1천원 등 모두 1만3천원이었다. 또한 상해에서는 그와 성월 등이 함께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린이 교육에도 힘써 마산 대자유치원,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 유치원 등을 설립하였다.

    1911년 1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1917년 1월부터 3년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지냈다.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학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포교의 중요성도 강조하며 마산 포교당 정법사(1912), 진주 포교당 연화사(1923), 창녕 포교당 인왕사(1923), 물금 포교당(1924), 언양 화장사(1927), 창원 구룡사(1929), 의령 수월사(1930), 부산 연등사(1932), 울산 포교당 해남사(1936), 양산 포교당 반야사(1940) 등 많은 포교당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전법을 전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역경사업에도 힘써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12년 11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발표 동참, 백산상회 안희제와 범어사 김상호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제공, 1920년 3월 의춘상회(의춘신탁)를 설립해 독립자금 마련, 1920년 4월 동아불교회를 설립해 항일불교운동을 시도하는 등 조국해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49년에는 중앙불교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1965년 10월3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납 81세였다. 제자는 전 종정 월하(月下) 스님 등 30여명의 출가제자가 있다.

    문손들에 의해 구하스님의 시문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인 『축산문집(鷲山文集)』과 『금강산관상기(金剛山觀相記)』가 최근 출간되었다..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경봉당 정석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경봉당 정석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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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근현대의 고승으로서 광주 김씨이며,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강원을 졸업 후,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이후, 한암, 제산, 용성, 전강 스님등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두터이 한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4월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다.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ㆍ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1967년 서울탑골공원에 '만해선사기념비'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 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고,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경봉스님이 지은 것이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 회마다 1천여 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호국선원 정수보각(正受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탑골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 27일)임종이 가까워 왔음을 느낀 시자 명정(明正)스님은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뵙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스님은 좌우로 돌아보고 임을 열었다. "야반삼(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납 75세 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벽안당 벽안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벽안당 벽안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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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안(碧眼)은 법호, 법명은 법인(法印)인 스님은 1901년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35세 때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면서 당대의 선지식인 석우(石友)스님 회상에서 불가의 도리를 배우고 정진했다. 제방선원을 돌며 화두를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峯)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한다. 늦은 나이에 출가를 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고 어른 스님들을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다. 스님은 경봉스님께 매일 아침 문안을 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극락암에 도착한 벽안스님은 은사 스님이 주석하는 경내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들어갔다. 은사 계신 곳에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 선원에서 하안거 정진 중이던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접하고 오도송을 읊는다.

    大道元來無繫縛(대도원래무계박) 대도는 원래 얽매임이 없으니
    玄機何處關形成(현기하처관형성) 현묘한 기틀 어찌 모양에서 찾으랴
    九旬磨劍寒霜白(구순마검한상백) 구순 안거에 서릿발 같은 지혜의 칼을 가니
    擊罷祖關各方行(격파조관각방행) 조사관을 격파하고 마음대로 노닐리라

    이후 통도사와 범어사 해인사 등의 선방에서 정진을 거듭한다. 43세에는 범어사에서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내시면서 청렴결백하고 公私를 구별하는데 있어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다. 공석에서는 가을서리(秋霜)와 같은 엄정(嚴正)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사석에서는 봄바람(春風)같은 따뜻함으로 대중들을 제접했다.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조계종 중앙종회 초대의장을 비롯해 2 · 3대 의장을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말년에 머물던 요사채에 ‘寂墨堂(적묵당)’과 ‘淸白家風(청백가풍)’이란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당신이 지녔던 수행의 면목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붓글씨 또한 스님 성품을 닮아 단아했다. 스님은 1987년 12월25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는 87세 법납 53세였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靈鷲片雲(영축편운) 영축산의 구름
    往還無際(왕환무제) 오고 감에 때(時)가 없네
    忽來忽去(홀래홀거) 홀연히 왔다가니
    如是餘時(여시여시) 때가 이와 같네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노천당 월하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노천당 월하스님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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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고승. 1915년 음력 2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은 법호(法號)이고 법명이 월하(月下)이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聖海)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

    어릴 때 집 근처의 고란사 스님들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이때 속가의 부모님이 설득했지만 결국 18세인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득도한 후,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법을 이었다.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50년도부터 30여년간 통도사에 전계대화상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셨다.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한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56년 통도사 주지를 하시면서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에 주석하며 통도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된다.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종단 개혁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을 재추대 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자리하였다.

    스님은 50여년 가까이 통도사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했던 스님은 졸음에 겨워하는 납자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로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채 지위고하와 노소를 막론하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대중운력에 빠지지 않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청규(淸規)를 지켜왔다. 詩(시) · 書畵(서화)에도 능했던 스님은 옛 조사스님들의 선시 전통을 이으면서도, 간단 명료한 언어와 선기 넘치는 선시를 지어왔다. 스님의 선시는 1998년 문도들에 의해 《월하대종사 상당법어집》으로 묶여진 바 있다.

    월하스님은 자신의 가풍에 대해 “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라고 말하였다. 대중교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녀, 1920년대 중반부터 통도사에서는 대중법회를 개설하여 한 달간 전국 고승들의 법문을 들려주는 화엄산림이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교화사업이 안정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는 방장스님의 원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후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사격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어른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후진양성에 필력을 다하였다.

    통도사가 오늘날 불지종가(佛之宗家) 총림(叢林)에 걸맞은 가람의 위용(偉容)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힘이 컸다. 특히 1992년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 건립기금으로 아무도 모르게 1억5000만원을 희사하기도 했다. 상좌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언론에 알렸다가 오히려 호된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는 스님의 기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월하스님이 2003년 12월 4일 오전 9시 15분께 세수 89세, 법랍 71세로 통도사 정변전에서 아래의 열반송을 남기고 열반하셨다.

    一物脫根塵(일물탈근진)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頭頭顯法身(두두현법신)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莫論去與住(막논거여주)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處處盡吾家(처처진오가)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금강계단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금강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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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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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후 가장 중요한 기록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두골(佛頭骨), 부처님의 치아(佛齒)등 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 범종 모양을 하고 있는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 내용은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스님께서 당나라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현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이 후 스님은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울 위해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금강계단의 역사 bc7c92cb5b1b9f9677661e234d392e37_1714750479.png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금강계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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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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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계단은 연못을 메우고 건립한 통도사의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비유로 써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된다. 이 삼학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부처님의 행동을 닮아가는 연습인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항상 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며 반야의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함으로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을 금강계단이라 한다.

    자장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부터 철저히 계율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였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철저한 계율의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로 나타났고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함에 있어서 첫째 요건은 계율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서기 위해서 비구는 250가지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받아야 참다운 불자(佛子)로서의 일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비단 출가자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일상생활에는 항상 계율을 지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려는 승려대로 청정한 모습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하며 재가신도는 그 나름대로 철저한 윤리의식 속에 이 사회를 정토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이 단순한 금계(禁戒)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보살계(菩薩戒)로 확산될 때 대승불교의 참된 이상(理想)이 이 땅에 펼쳐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의 대국통 자장스님께서 이 땅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참된 의미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오늘날 까지도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금강계단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고려초의 관직을 뜻하는 안렴사(按濂寺)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보니 처음엔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石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한다. 그 뒤로는 감히 돌 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 고종 22년(1235)에 상장군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庾公)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1264년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렸으며,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지공·나옹·무학의 3화상 중의 한 분임]스님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으며, 또한 스님은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였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한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스님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377년과 1378년에 계단은 큰 수난을 받았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동해변에 왜적이 침탈이 빈번해질 때였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다.

    조선시대의 금강계단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금강계단은 또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이신 금강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온 국토가 침탈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盤寺)에 봉안하게 했다. 사명대사는 휴정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오기까지 금강계단은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금강계단의 초창과 중건사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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