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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석등(通度寺 石燈)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석등(通度寺 石燈)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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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

    관음전 전방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높이는 약 300㎝로서 그 조성수법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여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가운데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 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고,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으며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양식뿐만 아니라 화문(花紋)의 조식(彫飾)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전체 높이는 약 350cm이고,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개산조당(開山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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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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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통도사 개산조당(開山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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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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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한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해장보각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전각 정면에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문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서 ‘솟을삼문’형식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통하는 문의 3칸 건물인데 중앙 칸이 양 측면 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삼문’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삼문과 같다.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해장보각(海藏寶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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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해장보각(海藏寶閣)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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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의 창건은 영조 3년(1727)이고 그 후 고종 4년(1900)에 고산대사(古山大師)가 중수하였다.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한 해장보각은 정면 3칸, 특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내부 앞쪽에 내진(內陣 : 안두리)기둥이 배치 되어 있다.

    이 전각을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 장경(大藏經)진리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다.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자장스님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 이 자장스님이 중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에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율사가 삼장(三藏 : 經藏, 律藏, 論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하였다. “(『삼국 유사』전후소장사리조)고 한 내용은 이미 삼국시대에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奉安) 사찰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 대장경이 다른 사람 아닌 창건주 (創建主) 자장율사에 의하여 봉안되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그 전각에 들어오는 문을 개산조당이라 하였고, 전각 자체를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장보각 자장율사진영(海藏寶閣慈藏律師眞影)

    통도사의 개산조(開山祖)인 자장율사의 진영이다. 좌팔분면(左八分面)의 의자상이나 가부좌한 자세이며, 왼손에는 불자(拂子)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불자의 술을 만지고 있는 모습이다. 배경은 크게 2단 구성을 보여 준다. 상단은 짙은 녹색이고 하단은 돗자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백색이 어서 강한 색채대비를 준다. 이 진영의 봉안처인 개산조당(開山祖堂)이 1727년(영조 3)에 건립되었으나, 진영의 조성연대는 1804년이므로 이 진영에 앞서는 자장율사의 진영이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홍색 가사와 녹색 장삼이 강렬한 색채대비를 보여주나, 같은 농염의 채색을 반복해 사용하고 있고, 음영이 표현된 필선은 힘이 빠져 조성연대가 조선후기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안면(顔面)에서 풍기는 인상은 고승의 위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화사(畵師)는 성인(成仁)과 계한(戒閑)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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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련 : 해장보각(海藏寶閣)
    寶藏聚玉函軸 보장취옥함축보배스런 경을 모아 옥함에 보관했네.
    集西域譯東土 집서역역동토서역에서 모아 동토에서 번역했네.
    鬼神護龍天欽 귀신호룡천흠귀신이 보호하고 천룡이 흠모하니
    標月指渡海筏 표월지도해벌마음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고해를 건너는 땟목이네.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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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개산조당의 앞에 자리한 석탑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37가지의 방법을 말합니다. 즉 4염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역(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수행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장경각(藏經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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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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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통도사 장경각(藏經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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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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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18세기 이후), 문화재자료 제144호

    장경각은 절에 내려오는 경전과 목판을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초창 및 중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 18세기 이후의 건물로 생각된다. 장경각은 통도사에 전해지는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經板)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이전된 장경각의 목판은 정시한(1625~1707)이 저술한 산중일기에도 등장하는 17세 초반 활동한 대 각수 연희가 발원하여 직접 제작한 목판들로서, 통도사에서 약 10km 떨어진 울산 운흥사(雲興寺)가 조선말기에 폐사될 때 옮겨온 중요한 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목판(木版)장경을 봉안하였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을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중요 경전들로『능엄경』,『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疏)』,『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법수(法數)』,『사집(四集)』 등 15종의 경판이 있다. 따라서 통도사는 사찰의 교육기관인 강원을 통해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세존비각(世尊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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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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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통도사 세존비각(世尊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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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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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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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1706년) 양산 통도사 석가여래 영골 사리 부도비 , 경남 유형문화재 제544호

    이 비각(碑閣)은 1706(숙종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곧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봉안하여 보관하였다. 그 후 한 개의 함은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토록 하였고, 또 다른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에 봉안되었음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고 있어 참고된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肅宗) 32년(1706)이며 높이는 2.5m, 폭 1m이다.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영각(影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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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영각(影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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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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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8 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영자전(影子殿) 이라 불리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련 : 영각(影閣)
    偶尋樵者問山名 우심초자문산명우연히 나무하는 아이를 만나 산 이름을 물으니
    上方月曉聞僧語 상방월효문승어한밤중에 봉우리에 경쇠 소리가 있네.
    野鶴巢邊松最老 야학소변송최노하늘에는 달이 밝고 스님들 말씀이 들리고
    願得遠公知姓字 원득원공지성자아래로는 수풀이 성글고 지나가는 객이 보인다.
    半夜中峯有磬聲 반야중봉유경성들의 학은 가장 늙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下界林疎見客行 하계임소견객행독룡이 숨은 곳에 물이 맑음에 치우치고
    毒龍潛處水便靑 독룡잠처수편청원컨데 원공의 성자를 알고자해서
    焚香洗鉢過餘生 분향세발과여생향 사르고 발우 씻고 남은 생을 보내리.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불이문(不二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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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불이문(不二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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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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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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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18세기 이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 문은 1305년(충렬왕 31) 처음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내부는 매우 단조롭게 처리되어 종래 수법(手法)과는 달리 중앙의 대들보를 코끼리와 호랑이가 이마로써 받쳐 이고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역시 코끼리와 호랑이가 건물의 하중(荷重)을 이마에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도리(道理)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대들보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태를 삼각형으로 짜 그 부재 위에 장혀[長舌]를 걸 쳐 중도리(中道理), 하중도리(下重道理), 종도리(宗道理)를 얹어 서까래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불이문 현판에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藍)이라는 글씨는 송(宋)나라 미불(米連 : 號는 元章)의 필체이다. 이것은 통도사가 한국불교의 근원으로서 불교의 근원이고 근본인 계율중심도량이고,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최초에 설법하신 화엄도량임을 모두 포함한 함축성 있는 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이문(不二門)의 불이(不二)의 뜻은 법계의 실상(實相)이 여여평등(如如平等)하 여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는 것을 ‘불이(不二)’라 하며 이 법계불이(法界不二)의 진리가 불법의 궤범(軌範)이므로 ‘불이법(不二法)’이라 하고 일체 성인이 모두 이 불이(不二)의 법에 의하여 진리에 취입(趣入)하므로 불이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청정한 불법도량의 중심부가 되며 불이(不二)의 진리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난 다는 뜻에서 해탈문 이라고도 한다.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황화각(皇華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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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황화각(皇華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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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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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화각은 통도사의 스님들이 경(經)을 공부하는 강원건물로 천자각이라고도 한다. 초창은 1317년(충숙왕 4)에 이루어졌으며, 1647년(인조 27) 탄변화상(坦卞和尙)이 중건하고 1906년 성해화상(聖海和尙)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ㄴ자 평면으로 두 개의 건물을 합친 큰방이다. 이곳은 강원과 학승(學僧)들이 거처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이들 건물은 일반 신도와 격리되도록 북쪽과 서쪽에서 출입하게 되어 있어 경학을 공부하는 공간답게 처리하였다.

    주련 : 황화각(皇華閣) - 천자각

    敎融海嶽恩廓乾坤 교융해악 은확건곤가르침은 산과 바다를 꾸리고 은혜는 하늘과 땅에 퍼지네.
    大護法不見僧過 대호법불견승과크게법을 보호하는 사람은 승려의 허물을 보지않고
    善知識能調物情 선지식능조물정선지식은 능히 세상 물정을 살필 줄 아네.
    百戰英雄知佛法 백전영웅지불법백전영웅은 불법을 알고
    再來菩薩說家常 재래보살설가상거듭 화현해서 보살은 일상 속에서 도리를 설해주네.
    永使蒼生離苦海 영사창생이고해영원히 중생들로 하여금 고해를 여의게 하고
    恒敎赤子有慈航 항교역자유자항항상 어린아이 같이 보살펴 자비의 배를 타게 하네.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5교구 통도사 통도사 원통방(圓通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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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통도사 원통방(圓通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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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작성일
    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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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방과 감로당은 화엄전, 황화각과 함께 중로전의 대방(大房)이다. 원통방과 화엄전은 법회시 대중을 수용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고종19년(1882)에 화엄전, 원통방, 감로당이 함께 소실되었고, 잇따른 화재로 1887년 덕명(德溟)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통도사사적비」에 따르면 고종 19년(1882) 화엄전에서 실화하여 원통방과 감로당이 소실(燒失)되었으나 다음 해에 중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과 4년 만에 다시 감로당에서 실화하여 명부전과 함께 원통방, 화엄전까지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인 1887년 덕명대사(德溟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 건물로 강원의 학인 대중방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 건물과 동, 서 그리고 남쪽에 객실 3채가 있어 口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중앙에 중정(中庭)이 생겨 주택의 평면형과 같은 구조이다. 감로당을 비롯한 口자형 건물들은 약 86칸으로 거실, 마루, 부엌, 창고, 식당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통방과 감로당은 원래 口字형 건물이었으나 2009년 원통방과 공양간 중창으로 지금은 다소 변화되었다. 감로당 동쪽 측면에 위치한다. 초창은 1341년(충혜왕 복위 2)이지만 영조 때에 탄해대사(坦亥大師)가 중건하였고 1886년 감로당과 함께 소실되고 다음해에 매예대사(每藝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 원통방의 ‘원통’ 의미는 ‘관음보살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유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