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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金堤 金山寺 深源庵 三層石塔(보물 제29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金堤 金山寺 深源庵 三層石塔(보물 제29호)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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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4.65m이며, 전체적으로 신라 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으나 옥개석<屋蓋石>이 넓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급한 면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방형이다. 지대석은 거의 땅에 묻혀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1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탑신은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장씩이나, 초층 옥신은 4장 구성으로, 2면은 우주가 있는 판석이고 다른 2면은 면석(面石)을 끼웠다. 2층 이상의 옥신에는 네 우주만이 표시되었다.

    옥개석은 넓고 추녀 밑이 곡선을 그리며 반곡(反曲)된 점은 특이하다. 받침은 각층 4단이며 너비가 좁아 추녀 밑에 넓은 공간을 남겼다. 낙수면(落水面)은 경사가 급하고 전각(轉角)의 반전은 추녀 밑을 따라 평행이다. 전체의 형태가 각 부의 체감률이 적은 탓으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석재<石材>의 결구<結構>가 규칙성이 없고 각부의 조각이 섬약<纖弱>하다. 심산<深山>에 위치하여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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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호남의 젓줄 모악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호남의 젓줄 모악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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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악산은 동경 127°01′00″, 북위 35°45′30″에 위치하며 높이는 795.2m이다. 노령산맥의 서단부에 위치하며 호남평야와 전라북도 동부 산간 지대의 경계가 된다. 1971년 12월 모악산을 중심으로 면적 42.44㎢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금산사지(金山寺誌)를 보면 ‘엄뫼’라는 말이나 ‘큰뫼’라는 말은 아주 높은 산을 의미하는데,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해서 ‘모악’이라 했고, ‘큰뫼’는 ‘큼’을 음역하고 ‘뫼’는 의역해서 ‘금산(金山)’이라고 적었다고 되어 있다.

    모악산 母岳山 Moaksan [異] 금산(金山)

    모악산 母岳山의 정상은 국사봉이다. 김제시 금구면 방향에 금산사(金山寺)가 있고 구이면에 도립미술관이 있다. 『고려사』에 “태조 18년 을미(920년) 봄 3월,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 생몰미상)이 그 아버지를 금산(金山)의 불우에 가두고”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금산으로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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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김제 모악산 일대>


    『여지도서』(전주)에 “관아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고덕산(高德山)에서 뻗어 나와 남쪽으로 금구현(金溝縣)에 닿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산사지』에 의하면, 모악산은 어머니의 뫼라는 ‘엄뫼’를 의역해서 모악(母岳)이라 칭했고, 그 이전에는 아주 높은 태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큰 뫼’라는 말을 음역하여 금산(金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전라북도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광여도』와『해동지도』에 ‘무악산(毋岳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승』과 『1872년 지방지도』에는 ‘모악산(母岳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모악산은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新都安),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명당(名堂)이라 하여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각종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한국신흥종교총람』에 의하면, 40여 개에 가까운 교단들이 있어 계룡산보다 많으며 대부분 증산계(甑山系)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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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구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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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읍지>


    금산면 金山面 Geumsan-myeon은 원평천 주변에 사금을 함유한 암석이 풍화되어 쌓여 금산면은 한때 금구면·봉남면과 함께 사금(砂金) 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지명은 1935년 창건된 금산사(金山寺)에서 이름을 따서 유래되었다고 향토지에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서이현, 통일신라시대에 이서현, 고려시대에 거야현 지역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금구 현 수류면 지역으로 23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서양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강화를 위한 여러 정비 및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지 방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187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을 추진하였다. 이때 제작된 지방지도는 조선시대의 마지막 관찬지도官撰地圖이다. 총 459매로 짧은 시간에 제작되어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이전 지도와 비교하여 가장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금구현 지도金溝縣地圖는 지금의 전북 김제시 금구면, 황산면, 봉남면, 금산면에 해당하는 곳을 그렸다. 읍치邑治가 있는 동쪽을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우측 상단에는 모악산이 있으며, 모악산 자락에 금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금산사의 금강문, 미륵전, 칠성각 등이 표기되어 있다. 또 미륵전 뒤 송대松臺와 석탑은 그려져 있지만 방등계단은 그리지 않았다.

    호남읍지는 고종 32년(1895)경에 작성된 전라도 56읍의 읍지를 모은 책이다. 총 1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읍의 지도와 함께 읍지邑誌와 사례事例를 첨부하였는데 각 읍별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읍마다 체재는 차이가 있다. 읍지 부분은 이전의 읍지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며, 사례에는 읍의 수입과 지출 내역 및 행정 업무 내용이 기록되었다. 사례부분이 강조된 읍지로 전통적인 읍지와는 성격에 차이가 있다. 금구현의 「사찰寺刹」조에 금산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금산사는 현 남쪽 삼십리 모악산에 위치해 있다. 견훤이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견훤의 금산사 유폐와 탈출에 대해서도 간략히 기록하였다. 또 장륙금불丈六金佛이 있다고 적었다.

  3.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태공당 월주 대종사 (1935~2021)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태공당 월주 대종사 (1935~2021)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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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주스님은 법주사로 출가하여 금오대선사를 은사로 모셨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재17대,28대 총무원장을 역임하셨으며, (사)지구촌공생회 대표이사, (사)함께일하는 재단 이사장, 나눔의 집 이사장, 금산사·실상사 조실을 지내셨습니다. 대한민국 국민훈장무궁화장, 만해대상(평화부문·실천부문), 미얀마 사따마 조디까다자(성자) 최고 작위를 받았습니다. 저서로는 <보살사상(화갑론 문집)>, <보살정론>, <인도성지순례기>, <보살사상경구선집(편저)>, <도심집>, <토끼뿔 거북털> 등이 있습니다.
    속명 : 송현섭(宋眩燮), 법호 : 태공(太公), 법명 : 월주(月珠), 본사는 전북 김제 금산사 입니다.
    태공당 월주 대종사의 생애는 대한민국과 한국불교의 근·현대사 그 자체셨습니다. 세간의 학문을 익히고 출가하여 수행정진하며,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것은 물론 국가와 겨레의 고통을 해결하고, 세계인류의 공생(共生)을 실현하고자 한 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산외초등학교, 서울 중동중학교, 정읍농고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종교적 실천수행을 통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하고자 염원하셨습니다.

    태공 월주 스님 행장(1935~2021)

    큰스님의 삶이 지금 우리 시대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산사(山寺)에 머물러 갇혀 있지 않고, 동체대비의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일생동안 한결같이 견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출가 사문으로써 참선수행과 병행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더해주는 자비행도 더 없이 소중하다는 가르침을 솔선수범하여 보여주셨습니다.
    1966년 제2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의장 등 종단의 공직을 맡아 대한불교조계종의 튼튼한 초석을 다져놓으셨습니다.
    불교정화운동의 여진으로 종단이 직면하고 있던 현실적인 과제를 직시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예지(叡智)를 여실히 보여주셨고, 나아가 미래 한국불교의 백년대계를 설계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이해를 떠나 오로지 공심(公心)을 앞세웠기에 사부대중의 신망을 받아 1980년 4월 대한불교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40대 중반에 총무원장이라는 대임을 맡은 큰스님은 일본식 왜색불교의 청산과 청정비구의 정화정신을 바탕으로 종단 내부의 갈등을 종식하고 화합의 시대정신을 선양하셨습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부당한 국가권력의 간섭을 배제하는 한편, 제도개혁을 통해 대한불교조계종이 한국사회의 밝은 등불이 되도록 기여하셨습니다.
    12·12사태와 5·17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정권의 지지성명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5·18민주화 운동이 전개되는 광주를 방문하여 부상당한 시민을 위로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봉행하셨습니다.
    이러한 큰스님의 족적은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다는 육조혜능(六祖慧能) 선사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佛法在世間(불법재세간)
    不離世間覺(불리세간각)
    離世覓菩提(이세멱보리)
    恰如求兎角(흡여구토각)
    불법은 세간 가운데 있으니
    세간을 떠나서 깨닫지 못한다네.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다면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

    1980년 신군부는 국민들의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일환으로 무장군인들을 동원하여 군화발로 신성한 사찰을 짓밟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10·27법난을 일으켜 종권을 찬탈하고 불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 이후 큰스님께서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을 수밖에 없었고, LA반야사에서 참선수행을 통하여 미래에 대한 혜안을 갖게 되셨습니다.
    지혜를 증장시키는 지증보살(智增菩薩)도 훌륭하지만 자비를 폭넓게 펼치는 비증보살(悲增菩薩)의 공덕이 수승하다는 <화엄경>의 가르침대로 큰스님은 일상에서 자비행을 초지일관 실천하셨습니다.
    산중(山中)의 수행일변도에 집착하지 않고, 외롭고 도움이 필요한 시민과 동고동락하는 역동적인 보살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1988),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1989),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1990),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장(1992)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해결에 공헌하셨습니다.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28대 총무원장 취임한 이후 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공동대표겸 이사장(1996),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공동대표의장 겸 이사장(1996), 대통령국토통일고문회의 고문(1998), 실업극복국민공동위원회 위원장(1998),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 이사장(1998) 으로 활동하면서 사회고(社會苦)를 해결하므로써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량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어른으 써 종교계의 지도자로써 귀감이 되어주셨습니다.
    1994년 희망찬 개혁종단의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큰스님은 승가교육을 전담하는 교육원과 포교전법을 전담하는 포교원을 설립하여 내실을 다지는 한편,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주창하여 수행과 교화가 둘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1998년 제28대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사바세계에서 연꽃을 피우기 위해 시민사회운동과 비정부기구(NGO)를 통하여 많은 구제활동에 정진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일본군 피해자 할머니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 국가와 국민을 대신하여 나눔의 집을 설립하였고, 낙후된 환경에서 고통받는 인류 구원을 위한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하여 자비의 연꽃을 피워냈습니다.
    큰스님은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에서 “이제는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내게는 ‘제2의 출가’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눌 수 있는 큰 우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80이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29년 동안 무보수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따뜻하게 지켜주시고, 장시간 비행기에 고령의 몸을 싣고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달려가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편하게 쉬시면서 여생을 보내시면 좋겠다”는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도 중생들이 사는 ‘삶의 현장’을 항상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정신적 괴로움이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큰스님께는 수행처이자 도량(道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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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地與我同根(천지여아동근)
    萬物與我一體(만물여아일체)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큰스님의 자비행에 감동한 정부와 교계 안팎에서도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시하였습니다. 국민훈장 모란장(2000), 국민훈장 무궁화장(2011), 캄보디아 국왕 훈장(2010), 미얀마 최고 작위 ‘사따마 조디까다자’(2013), 조계종포교대상(2005), 만해대상(2014), 제1회 민세상(2010), 대원상(2013) 등을 수훈 또는 수상하셨습니다.
    큰스님은 회고록에서 여생의 소망을 “몸담고 있는 종단, 민족과 사회, 지구촌의 인류를 위해 대중과 함께하는 자세로 심부름하는 자세로 사는 것일 뿐”이라며, “소임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출가자로서의 한결같은 소망이자 소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수행정진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중생을 구제하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길을 걸어오신 큰스님은 2021년 7월 22일 세수 87세, 법납 68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비록 세연을 다하셨지만, 큰스님의 삶 그 자체는 무명의 세계를 밝히는 밝은 등불로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제 원효스님의 말씀을 빌려 큰스님의 가르침과 자비행을 요약하겠습니다.

    歸一心源(귀일심원)
    饒益衆生(요익중생)
    일심(한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라

  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중창주 진표율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금산사 중창주 진표율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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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진표율사는 완산주 만경현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 12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유명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진표율사는 끝이 없는 수행에 들었다. 특히 ‘율사’라는 존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戒를 매우 중시하였고, 계법戒法을 얻기 위해 철저한 수행을 하였다. 자신의 몸을 버리는 망신참법亡身懺法을 행한 진표율사는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았지만 수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다. 마침내 미륵보살의 현신으로부터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두 권과 189개의 간자簡子를 받고 하산하였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을 때 용왕龍王이 나타나 진표율사에게 옥으로 된 가사를 바쳤다. 스님은 용왕이 거느린 8만 권속의 호위를 받으며 금산사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바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만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이 도솔천兜率天에서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스님께 계법戒法을 주니 스님은 사람들에게 권하여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만들게 했다.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던 모양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갑진년(764) 6월 9일에 주성하여 병오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하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766)이었다. 이후 진표율사는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를 중창하고 이어 금강산 발연사鉢淵寺를 개창하였다.

    진표율사는 대중 교화에도 힘썼다. 특히 점찰법占察法을 행한 점찰법회를 자주 열었다. 점찰법이란 『점찰선악업보경』에 의거하여 나무로 깎아 만든 목륜木輪 간자를 굴려서 나타난 모양으로 점을 치는 것이다. 점찰법으로 전생에 지은 죄를 알고 이를 참회하고자 하였다. 진표율사는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189개의 간자로 점찰법을 시행했으며, 이를 통한 참회를 수행법으로 제시하였다. 점찰법을 통한 수행은 대중들에게 미륵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진표율사의 행적이 전한다. 「진표전간」에는 진표율사가 출가하여 수행 끝에 미륵으로부터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 189개를 받았다는 내용과 금산사에서 법시法施를 베풀고 왕실의 후원을 받은 일과 진표율사의 제자들을 열거하였다.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스님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은 것과 금산사를 창건하고 사람들을 교화한 이야기, 금강산 발연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연 내용이 전한다.

  5.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혜덕왕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금산사 혜덕왕사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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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1038~1095)은 고려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이 이씨(李氏)이며, 1038년(정종 4) 7월 3일 개성의 남쪽 불령리에서 중서령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민(民)이고 자는 범위(範圍), 소현은 법명이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소현은 출가 후 해린에게서 『금광명경』과 『유식론」 등을 배우면서 법상종을 익혀나갔다. 12세 때 부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61년(문종 15년) 왕륜사에서 열린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서 대덕(大德)의 칭호를 받았다. 고려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096년 12월 18일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 숙종은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여 탑비를 세웠다. 글씨는 구양순법의 해서로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왕사의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과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이다. 그리고 음기記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명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8백여 명에 이른다. 이 비의 음기는 고려시대 스님의 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예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6.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도생승통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06
    금산사 도생승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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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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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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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생승통의 이름은 규(窺)이며, 고려 문종(文宗, 1046~1083)의 여섯 째 아들이다. 같은 시대를 활약했던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은 바로 스님의 친형이며, 문종의 넷째 왕자(王子)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융성을 거듭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아들이 셋 이상 있는 집에는 한 아들을 출가시킬 정도로 불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의천(義天)이 득도한 것은 문종 19년(1065)이었고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도생(導生)이 득도한 것은 문종 23년(1069)이었다. 아마 어려서 출가했으리라 짐작된다.

    문종은 스님의 출가 의사를 확인하고 연덕궁(延德宮)으로 혜덕왕사(慧德王師)를 맞아들여 계를 받고 득도하도록 하였다. 스님은 오랫동안 법주사(法住寺) 주지직을 맡았다. 그러다 숙종 원년(1095) 혜덕왕사가 돌아가시자 금산사의 주지직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스님의 행적이나 만년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스님이 통상 승통(僧統)으로 불리어졌고 금산사를 중창했다고 전해올 따름이다. 고려시대 승통은 교종의 최고 법계이므로 도생승통은 당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스님이었다.

    이 문집은 고려 초기 대각국사 의천의 시문집으로 『대각국사문집』 20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각국사문집』에는 서序·기記·표表·사辭·장狀·서書·소문疏文·제문祭文·진찬眞讚·시문示文·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외집』에는 편지글, 기記, 시詩, 비명碑銘 등이 있다. 권19에는 대각국사가 도생 승통이 속리사에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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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원명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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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 원명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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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집 가정집 稼亭集일제강점기 1939년27×18.6 국립중앙도서관>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중창한 분이 원명 해원(圓明海圓 1262~1330)스님이다. 스님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학하여 유식학과 계율로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유가학승(瑜伽學僧)으로서 묘탑과 비석이 중국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에 전한다. 속성은 조(趙)씨로 완산주 함열군에서 대호군 조혁(趙奕)의 이들로 태어나 12세에 금산사의 석굉(釋肱)법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1294년(충렬왕 20)에 승과고시인 오교대선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후 불주사(佛住寺)의 주지를 맡았다.

    l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이 스님의 계행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초빙했다. 1311년(충선왕 3) 원나라 무제(武帝)의 원찰로서 숭은복원사가 창건되었다. 원나라 인종은 중국의 여러 고승을 제쳐두고 스님을 초대 주지로 임명하였고, 이후 스님은 원 황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한편 스님의 명성은 되돌아 고려 국내에 자자하게 알려졌고, 이에 충숙왕은 1328년(충숙왕15) 원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스님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충숙왕에게서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碍國一大師)라는 법호를 받고 귀국하여 금산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몸가짐은 위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유식학의 교의에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펼쳤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을 설복시켰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천하고 귀함을 가리지 않았고, 한마음으로 맞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자들에게는 향상 백성의 힘으로 이룩된 도량에서 사치와 음식을 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면 미친 짓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가정집稼亭集』은 고려 후기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의 시문집이다. 이곡은 36세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등제하여 이후 고려와 원의 관직을 제수除授받았다. 고려와 원을 넘나들며 문인, 스님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문집에도 다채로운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와 원, 두 나라의 사회·문화를 포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가정집』 권6에는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한 원명 해원圓明 海圓(1262-1330)의 「대숭은복원사고려제일대사원공비大崇恩福元寺高麗第一代師圓公碑」 비문이 수록되어 있다.

    원명 해원은 12세에 금산사에서 출가하였다. 1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의 초청으로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1312년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가 창건되자 숭은 복원사의 첫 번째 주지가 되었다. 1328년 충숙왕이 금산사에 주지할 것을 청하자 귀국하여 금산사에 주석하고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8.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소요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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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 소요태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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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의 법명은 태능(太能), 법호는 소요(逍遙)이며 성은 오(吳)씨이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조선 명종 l7년(嘉靖41, 1562) 임술 9월에 태어 났다. 13세 되던 해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물외(物外 : 物外庵)의 선경(仙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출진(出塵)을 결심, 진(眞) 스님을 쫓아 머리 깎고 경률(經律)을 익혀 그 뜻에 통달하였다.

    태능은 또 휴정(休靜) 대사가 묘향산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다. 휴정은 한번 보매 태능을 법기(法器)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태능스님은 휴정대사의 회상에서 3년여 선(禪)을 참구한 끝에 스승의 명에 따라 당(堂)을 열고 법화(法化)를 편다. 이때의 나이 20세였다.

    서산의 제자 중에서 태능스님은 편양(鞭羊)스님과 함께 선(禪)의 두 우두머리로 추앙되었으며 뒤에 태능스님의 문하가 일파를 이루니 소요파(逍遙派)라고 불리웠다. 태능스님으로부터 선종(禪宗)을 이은 이는 침굉 현변(枕肱 懸辯)스님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사람은 해운경열(海運 敬悅)스님이며 전법(傳法)제자만도 30여 명에 이른다. 현재 금산사에 비석이 있는데,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비석 글을 지었다. 보개산 심원사(深源寺),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부도(浮屠)가 있다. 효종이 ‘혜감(慧鑑)선사’ 라는 시호를 내렸다.

    소요당대사비 逍遙堂大師碑는 효종 2년(1651)에 건립된 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의 비이다. 효종이 혜감선사慧鑑禪師라 시호를 내리고 금산사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비문을 찬하고, 조진석趙晋錫(1610-1654)이 글씨와 전액을 담당하였고 글씨는 해서楷書로 썼다. 13세 때 출가하여 부휴浮休의 문하에서 배운 뒤 사명대사 문하에 들어 그의 법을 받았다. 편양 언기鞭羊彦機와 함께 사명대사의 가르침을 이은 2대 선승으로 추앙받았으며, 양대 법맥(편양파와 소요문파)을 이루었다. 소요 태능과 금산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지만, 스님의 입적 후 금산사에 비가 세워졌다는 사실로 볼 때 금산사는 스님에게 있어 중요한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요당집逍遙堂集』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 태능스님의 문집이다. 스님의 입적 후 약 150년 뒤인 정조 24년(1800)에 태능스님의 6대 법손인 춘담春潭 스님이 시 200여 수를 모아 담양 옥천사玉泉寺에서 간행하였다. 책에 수록된 시는 대부분 선의 세계를 음미한 것이며, 가까운 스님이나 선비들과 주고받은 시도 일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시 이외에도 「용추사법당중창기龍湫寺法堂重創記」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1920년에 간행한 신문관新文館 연인본鉛印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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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당대사비, 조선 1651년, 높이 296> / <소요집, 일제강점기 1920년 반곽 17.2×11.7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9.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뇌묵 처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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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뇌묵 처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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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묵대사 처영 진영, 조선후기, 원광대학교 박물관>


    조선시대는 사찰을 줄이고 스님의 도성출입도 제한하는 등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하여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도첩제를 더욱 강화하고 연소자의 출가를 금하였으며, 특히 불교종단을 7종에서 선교 양종으로 줄이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을 남겼다. 금산사는 태종 대에 전라도 지역의 선종사찰에서 제외되었으며, 세종 대 선교양종의 지방 본산 사찰 18사에도 들지 못했다. 이처럼 금산사는 침체되었으나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많은 인명피해가 생기고 사찰과 문화재는 약탈당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의식이 곳곳에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는데 출가자인 스님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왜적과 싸웠다. 선조는 서산대사 휴정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제수하였고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천이나 되었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 유정대사와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왜란이 일어나자 처영스님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 1천여 명을 모아 전투에 참가하여 호남 승군의 총수로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권율과 행주대첩에 1천여 승군을 이끌고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화엄사, 대흥사, 백양사, 내장사 등의 스님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로로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뇌묵대사 처영은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기허대사 영규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승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묘향산妙香山 수충사酬忠祠에는 휴정, 유정, 처영 세 분의 의승장이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어, 의승장으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뇌묵대사는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은 뇌묵대사는 왼손에 용머리와 영락으로 장식된 불자를 들고 오른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화면 왼쪽의 상단에 뇌묵대화상진雷默大和尙真이라 영제影題를 썼다.

    뇌묵대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스님의 행장行狀은 물론이고, 생몰년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 뇌묵대사의 활약이 『난중잡록』에 언급되어 있어 뇌묵대사의 의승군 활동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 『난중잡록』은 남원 출신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선조 15년(1582)부터 왜란의 정국이 일단 정리되는 광해군 2년(1610)년까지의 본편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다룬 『속잡록續雜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경남 자신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뿐 아니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과 풍속을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사회전반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될 때에 조정에서 원본을 빌려가 참고할 정도로 당시에 이미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이 승장인僧將印은 뇌묵 처영에게 하사한 것으로 구리로 만든 도장이다. 뇌묵대사는 행주대첩 이후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축을 명받아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교룡산성의 승병장이 된 후 7개월 만에 성을 크게 수축하여 호남 방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산성별장山城別將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이 도장을 새겨 보낸 것이다. 도장은 산성 내의 선국사善國寺 주지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동학혁명군 김개남金開南이 교룡산성을 본거지로 활동할 때 유실한 것을 1960년 당시의 주지였던 보월寶月스님이 보제루普齊樓 마루 밑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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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룡산성승장동인, 조선 1592년 혹은 1593년 7.8×6.3×6.5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7호>

  10.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제17교구 금산사 금산사 수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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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금산사 수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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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6

    조선 초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의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어지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중기 이후로는 민중불교가 되어 민중에 의해 신행되었다. 이러한 때에 민간신앙으로 전해지던 불교신앙은 억불숭유정책에 의한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과 불상 그리고 많은 불교문화재가 변란을 당하는 과정에서 백성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어 신봉되어진다.

    임진왜란 때 금산사 주지로 계시던 뇌묵 처영대사가 승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왜군들에게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에 왜군들이 금산사에 들이닥쳐 신라 혜공왕 때 세워진 미륵전과 혜덕왕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던 86채의 전각들을 모두 불태워 버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봉안한 미륵장륙상 철제 대좌를 빼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조선 인조13년(1635년)에 수문대사와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 15명의 화상에 의해 35년간 금산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당시 2개의 불전형(佛典形)으로 다시 중창 되었는데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화엄신앙이 그 하나이고, 삼층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불전은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가르며 교차되게 건립되어졌다.

    '삼층장육전' '미륵수계전' 등은 미륵전이라는 삼층 건물로 통합하여 만들어졌으나 1930년도에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해 미륵장륙상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를 1937년도에 다시 복원하였고 그후 1993년에 이르러 완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수문대사에 의해 화엄신앙과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졌으나 1986년 원인 모를 화재에 소실되고 태공 월주스님에 의해 대적광전과 나한전으로 따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