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본문 바로가기
싸이룩스 :: CYLOOKS
하늘닿은펜션
해운대원조할매국밥
봉평메밀꽃향기
래우식품 독도새우빵
허브나라농원
대관령하늘목장
달려라코코
전체보기
  1. 수동고을
    수동고을 수동고을 체험 프로그램
    작성일
    2024-08-10
    수동고을 체험 프로그램
    작성일
    2024-08-10
    480b8d740a719270555330e8598d98ae_1723265992_86.jpg
     


  2. 자두마을
    자두마을 자두마을 안내도
    작성일
    2024-08-10
    자두마을 안내도
    작성일
    2024-08-10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51520_42.jpg
     


  3. 자두마을
    자두마을 자두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자두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공수전리 유래
    공수전리라는 마을의 이름은 조선조때 관청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관가에서 정해놓고 경작하던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연유로 유래 되었다고 '양양의 땅이름(양양문화원)'에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200여년전 어느 지관이 이르기를 마을의 형국이 귀인공자처럼 생겼다하여 마을명칭이 꼭 알맞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마을 지명 유래
    북골 : 마을 북쪽에 있으며 골이 깊고 암자터가 있다 함.
    부엉더랭이 : 북골 안에 있는 골이며 암석이 많고 폭포가 있으며 부엉새가 서식하였다하여 생긴 지명.
    곤봉산 : 마을 서북간 산임.
    위연미기골 : 송천천과 공수전천의 합강(合江) 건너편 골이름.
    삿갓봉 : 수리와의 경계봉으로, 마을 동남간에 있음.
    쇠죽재 : 옛날 우차(牛車)꾼들이 쉬면서 소죽을 먹이던 곳으로 마을 서남간에 있음.

    마을 소나무 쌍솔과 전설
    우리마을 용소골(3반)에 500년이나 된 노송(강원도 지정 보호수)이 한그루 있는데 보기에 매우 아름답고, 또한 곧게 자라는 소나무와 달리 그 모양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영험한 형상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제를 지내며 형제 가족간의 우애나 풍년을 기원하거나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제를 지내 왔다. 옛날 이 소나무가 있는 용소골에 농사를 짓는 엄씨댁에 아주 우애가 좋은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 비가 몹시 내리던 날 강 건너에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형제가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다. 늘 형제의 다정한 모습과 애틋한 사연을 바라보던 소나무가 두 갈래로 자라게 되자 이를 보는 이들은 그 때부터 형제의 넋이 깃 든 것이라 여기게 되어 쌍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51361_63.jpg
     

    성황당과 마을대제(성황제)
    공수전리에서는 매년 성황당에서 마을대제를 지내며, 성황당은 마을이 내래다 보이는 숲속에 있으며, 매년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을대제(성황제)를 이 곳 성황당에서 치르고 있다.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51382_82.jpg
     

    대보름행사
    음력 1월 보름을 전후하여 대보름 행사가 열린다. 액운을 막아내고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보름행사는 마을 주민 모두가 나와 함께 흥겨운 전통놀이를 함께 즐긴다. 공수전리 마을 주민들은 달집 태우기농악, 그네뛰기, 쥐불놀이 등을 통해 주민간 화합과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범정사
    공수전리에 위치한 범정사는 불교사찰로 전통 불교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공수전리의 문화유적 중 한 곳이다.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51414_96.jpg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51415_64.jpg
     


  4. 치래마을
    치래마을 치래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치래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구룡령(九龍嶺) 아래 첫 마을인 갈천리는 예전 생활이 궁핍할 때 춘궁기에 갈근(葛根)으로 근근히 연명 하였는데 마을앞 계곡이 갈분(葛粉)일색이었다라고 하는데서 마을명칭이 유래하였다. 마을에서 2㎞ 가량 걸어 올라가면 철분·불소 성분이 많아 위장병·충치예방에 좋다고 알려진 갈천약수가 유명하다

    세대수 : 63세대
    인구수 : 145명
    주업 : 농업 (41농가)
    특징 : 산촌관광휴양마을로 민박, 펜션, 향토음식점 등으로 농외 소득 및 관광 소득 증대

    치래
    아홉마리의 용이 지나간 것 처럼 길이 구불구불하고 험하다는 구룡령 아래 첫 동네인 갈천(葛川)은 칡이 많아서 비롯된 마을이름으로 치래마을은 갈천을 우리나라 말로 풀어 쓴 명칭으로 어느마을 보다 산나물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갈천리
    구룡령(九龍嶺) 아래 첫 마을인 갈천리는 예전 생활이 궁핍할 때 춘궁기에 갈근(葛根)으로 근근히 연명 하였는데 마을앞 계곡이 갈분(葛粉)일색이었다라고 하는데서 마을명칭이 유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2㎞ 가량 걸어 올라가면 철분·불소 성분이 많아 위장병·충치예방에 좋다고 알려진 갈천약수가 유명합니다.

    구룡령
    홍천-양양간 경계에 있는 아흔아홉구비로서 용이 지나간 자리처럼 구불구불하다하여 구룡령이라 이름 붙여짐.

    정원대보름행사
    치래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마을의 화합과 발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행사를 개최합니다. 대보름 민속놀이로는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농악놀이 등이 펼쳐집니다. 특히 마을 지명유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정월대보름 행사 중에 칡국수 만들어 먹기 체험도 함께 열립니다.

    성황제
    매년 음력 9월 마을 성황당에서 열리는 치래마을 성황제. 대한민국 천지간의 신령한 기운 백두대간 구룡령을 타고 내려와 강원도 서면 갈천리에 이르니 갈천마을의 선량한 모든 사람의 안녕과 지역문화 발전을 기원하는 갈천리 성황제. 성황제가 열리는 갈천리 성황당은 지난 2008년 9월 새로 축조하여 전통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옥향판소리연구소
    갈천리에는 정옥향판소리연구소를 세워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는 정옥향 명창이 있습니다. “문화는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야 그 멋과 정취가 깊어진다”며 전통예술이 지역주민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5. 해담마을
    해담마을 해담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해담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지명유래
    해담마을 이전 명칭은 서림리이다. 서림리는양양군서면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림이 울창아혀 서림리라고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서림사가 있었던 연유로 서림골 또는 서림이라 하다가 1916년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서림리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훼손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림사터가있고, 해방전만 해도 180여 세대에 5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마을로 당시에는 5일장도 열렸던 전통의 마을이다.

    현서분교
    일제당시 서림리에는 갈잎학교라고 2년제 학교가 있었으나병자년 수해(1936년)에 떠내려가 2년후에 4년제인 현서공립학교가 들어섰다. 지금으로부터 7-여년전에 학교가 들어섰다. 현서국민학교는 최근에 학생수가 많이 줄어 상평초교 현서분교가 되었지만 마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교정에 오래된 벚나무가 드리워져 봄이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6. 해담마을
    해담마을 해담마을 안내도
    작성일
    2024-08-10
    해담마을 안내도
    작성일
    2024-08-10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45305_16.jpg
     


  7. 황룡마을
    황룡마을 황룡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황룡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10

    황이리는 40가구 12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서울로부터 278km, 양양군청 소재지로부터 20km, 서면사무소로부터 16km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구룡령 방향 국도 56선이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며, 법정리인 서림리 일부와 미천리를 합하여 황이리란 행정리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미천리는 미천골이라 칭하고, 보물 제444호-보물447호가 있는 선림원지가 있으며, 절이 있을 당시 스님들의 공양을 지으려 쌀을 씻은 물이 20km 양양 남대천 하류까지 흘렀다하여 쌀미(米)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칭하였다 합니다.황이리는 마을 가운데로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 싼 지형이 마치 귀 달린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황이리라 칭하였다 하고, 2007년 1월 13일 마을 연시총회에서 주민 만장일치로 ‘황룡마을’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황룡마을은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 황이리에서 유래

    양양군 서면 황이리 "황룡마을"은 백두대간 구룡령 산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다가 가파른 계곡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자리잡고 있 습니다. 마을 가운데로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싼 지형이 마취 귀 달린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 부터 황이리라 불렸다고 합니다.

    미천골과 선림원지가 있는 역사의 고장
    황룡마을의 미천골은 3층 석탑(보물 제 444호), 석등(보물 제 445호)등이 있는 선림원지가 있으며, 절이 있을 당시 스님들의 공양을 지으려 쌀을 씻은 물이 20km 양양 남대천 하류까지 흘렀다 하여 쌀미(米)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칭하는 등 역사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인심 넉넉한 전형적인 산촌마을, 얼음굴, 불바라기등 자연 속 휴양시설
    중복때까지 얼음이 있는 얼음굴, 불바다처럼 빨갛게 물들어 붙여진 불바라기약수, 백두대간을 접하며 가을 단풍에 빠져드는 문닫이암산, 스님들의 교육장이라 불리던 선림원지 등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사계절 계곡과 숲을 벗하여 자연 속 휴양을 즐기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휴양마을이기도 합니다.

    황룡마을의 전통한옥 숙박시설 및 체험관
    황토와 기와의 멋스러운이 살아있는 황룡마을체험관,단체숙박및 세미나실을 갖춘 산촌휴양 체험관,피톤치드 체험관등 다양한 숙박,체험시설을 갗추고 있어 편안한 휴식을 하기 좋습니다.

    마을의 위치 및 역사
    황이리는 40가구 126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서울로부터 278km, 양양군청 소재지로부터 20km, 서면사무소로부터 16km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구룡령 방향 국도 56선이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며, 법정리인 서림리 일부와 미천리를 합하여 황이리란 행정리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미천리는 미천골이라 칭하고, 보물 제444호-보물447호가 있는 선림원지가 있으며, 절이 있을 당시 스님들의 공양을 지으려 쌀을 씻은 물이 20km 양양 남대천 하류까지 흘렀다하여 쌀미(米)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칭하였다 합니다.황이리는 마을 가운데로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을 둘러 싼 지형이 마치 귀 달린 누런 황룡이 머무는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황이리라 칭하였다 하고, 2007년 1월 13일 마을 연시총회에서 주민 만장일치로 ‘황룡마을’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마을의 자연경관과 환경
    전형적인 농·산촌마을로서 중복 때까지 얼음이 있는 얼음굴, 불바다처럼 빨갛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진 불바라기 약수, 백두대간을 접하며 가을 단풍에 빠져드는 문닫이 암산, 스님들의 교육장이라 불리던 선림원지가 있습니다.
    자연그대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불바라기폭포, 상직폭포, 샘실폭포, 골짜기 하나가 폭포인 폭포골, 조봉, 매봉, 암산,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임도, 미천골 공예촌 등 마을의 자연경관은 그야말로 황룡의 휴식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 전체를 둘러싼 산림에는 송이버섯, 헛개나무, 산청목, 산나물, 엄나무, 피나무,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등 토종벌의 밀원지로서 농가 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산촌 지역의 민박농가는 수려한 경관과 함께 소박하고 농촌다운 정겨움이 있어 도시민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식처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미천골에는 국립 자연휴양림이 있어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이 4계절 내내 방문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 보물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가 고려 말에 폐사된 대규모 절터로서 3층 석탑(보물 제444호), 석등(보물 제445호),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 부도(보물 제447호) 등이 1966년 9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서림사지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3층 석탑 등이 1996년 9월 30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상평초등학교 현서분교에 복원 되어 있습니다.


    83d4d1dde104ec7879d8afb7baf65a55_1723244905_09.jpg
    보물 제44호 선림원지 3층 석탑 / 보물 제445호 선림원지 석등 / 강원도 문화재자료 2ㅔ1220호 서림사지 3층 석탑

  8. 산속호수마을
    산속호수마을 산속호수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산속호수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인구수(가구수) : 195명 (61가구)
    마을의 주요면적 : 대지 :7.8ha(0.25%),농지104ha(3.3%),산림3.095ha(96%)

    본래 간동면 지역으로 화천읍 동쪽지역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리 태산리 일부를 통합하여 간동면 동촌이라 하였다가 1937년 화천댐 건설로 저수지가 생겨 간동면과의 교통이 불편해짐에 따라 화천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태산리 전체가 동촌리에 통합되었다. 1964년 간동면 구만리에 화천면 동촌출장소와 간동면 구만출장소를 설치하여 유지해오다가 1981년 동촌 출장소가 폐지되었으며,1979년 5월 1일자로 동촌리가 1,2리로 분리되었다. 현재 동촌1리 주민들은 풍산리 흠사리의 호음고개로 이어지는 육상통로를 이용하고 있으나 동촌2리는 평화의 댐에서 진입하는 육로가 끊겨 대부분 선박을 이용하고 왕래하고 있다. 동촌리의 옛 이름은 관부리라하였고,건천공,골안,곱쟁이(여울),달래버덩등 마을 옛 이름들이 있으며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 있다.

    호식총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영혼을"창귀"라고 한다.
    "청우기담(聽雨記談)"이라는 책에 "창귀는 호식당한 사람의 영혼으로,감히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호랑이의 노예가 된다"고 했다.
    창귀에는 여러 이름이 있는데 박지원의 '호질'에는 '굴각(屈閣)'등의 이름이 보이고,민간에서는 '홍살이 귀신',특히 태백지역에서는 좀더 토속적으로 '가문글기'라 한다.
    창귀는 지억같은 호랑이의 위세권에서 탈출하려고 '사다리'또는 '다리'라고 불리는 행위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하려는 것으로 물귀신과 흡사한 행위이다.
    창귀는 늘 사돈에 팔촌까지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새 창귀감을 구하는데, 반드시 사람을 불러내거나 유인하여 범에게 데려간다.
    그래서 호식되어갈 사람들은 다른사람이 막아도 창귀가 씌여 자꾸 나가려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창귀가 이처럼 끈질기고 무섭다는 데서 호식총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분묘가 유래한다. 호랑이가 먹다 남긴 유구(遺構)를 태우는 것은 모든 화근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창귀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다.
    호식총에 돌을 쌓는 것은 신성한 지역임을 뜻함과 동시에 창귀를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는 금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 돌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으니 후손들이 벌초하러 와서 창귀 들릴 일도 없겠다.
    돌무덤 위에 시루를 엎어놓는 것은 하늘을 뜻하는 것이며, 철옹성으로 창귀를 가두어 놓는다는 뜻과 살아있는 것을 쪄서 죽이는 무서운 그릇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그 시루 위에 또 쇠가락을 꽂아 두는 것은 무기 또는 벼락으로 창귀를 제압하고자 함이며, 가락의 용도처럼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9. 토고미마을
    토고미마을 토고미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토고미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우리마을은 4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개마을 중 하나인 신대리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신대리는 옛날에 신풍리에 속한 마을로 어귓마을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동리(洞里)가 커지면서 1956년에 토고미, 느릅제기, 작은 토고미를 병합하여 신대리 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유래
    우리 마을이 왜 “토고미”인가 하면, 우리고장에는 기름진 옥토가 많아 부자가 많이 살았는데, 농사일에 품을 팔면 꼭 쌀로 품삯을 받았다하여 토고미(土雇米)라 불렸다고 합니다.

  10. 파로호느릅마을
    파로호느릅마을 파로호느릅마을 배치도
    작성일
    2024-08-09
    파로호느릅마을 배치도
    작성일
    2024-08-09
    141236129947272ee5854c4e4874711b_1723161558_82.jpg
     


  11. 파로호느릅마을
    파로호느릅마을 파로호느릅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파로호느릅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파로호느릅마을은 산속의 바다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파로호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하나인 용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정겨운 산촌마을이다. 자연경관을 태고의 본 모습으로 이어 가고자 온 주민이 노력하고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보다 믿을 수 있는 신의를 중요시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을이다. 1954년까지만 해도 용호, 도송, 유촌리가 통틀어 유촌리로 되었으나, 그 해에 유촌리, 용호리, 도송리로 분할되었고 이후 1979년 9월 1일 유촌 1,2리로 다시 분활되어 왔으나 생활권은 1,2리로 구분되지 않고 행정리만 1,2리로 불리고 있다. 산채체험을 할 수 있는 수불무산과 용화산의 수려한 산림에 복합산림경영단지를 활성화하고 있으며 국립산림과학원의 지원으로 우리 닭 2호라는 개량 토종닭을 자연에서 자유롭게 스트레스 없이 키울 수 있는 방목 양계를 통해 마을의 수익을 높이고 있다. 또 약선요리를 중심으로 자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농가맛집과 황토펜션과 글램핑장을 갖추고 있어 농박 체험마을로도 각광받고 있다.

    청정 자연을 배경으로 농사와 전통 민속놀이를 체험 할 수 있는 생태마을로서 이 마을은 옛날 황해도 해주에서 오(吳) 씨가 낙향해 당시 느릅나무숲으로 이뤄졌던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번성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주민의 1/3 이상이 오(吳)씨 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메뚜기쌀’이다. 8년 전부터 무농약으로 쌀을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그 후 사라져가던 메뚜기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제 가을이 되면 온 마을 들녘에서 뛰노는 메뚜기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추수철에 이 마을을 방문하면 ‘메뚜기 잡기 및 벼베기 체험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온 가족이 함께 쌀을 직접 추수하고 메뚜기도 잡아보면서 청정 자연을 체험하고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 행사는 매년 9월 15일에서 10월 15일 사이에 열린다. 이 외에도 허수아비 만들기, 재래식 탈곡 체험, 농산물 수확 체험 등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에는 마을에서 생산된 신선한 재료를 이용한 별미를 맛보도록 하자. 파로호 애호박으로 만든 애호박찜, 옛 맛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막국수, 근처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로 요리한 산채 비빔밥, 고소하고 담백한 호박만두에 화천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이면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12. 파로호생태마을
    파로호생태마을 파로호생태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파로호생태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9

    파로호생태마을은 화천군 구만리 뒷쪽 골짜기에 위치하게 되므로 뒷골 또는 후동(後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촌리에 편입되었다가 1937년 화천댐 완공으로 인하여 저수지가 생기고 1954년에 와서 유촌리에서 분리되었다.
    마을의 명칭은 마을 뒤에 있는 용화산의 용(龍)자와 파로호의 호(湖)자를 따서 용호리라 칭하게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씨조선 말기에 그전까지는 석(石)씨가 이 마을의 대부분이었는데 왕의 후궁으로 들어간 여산 송씨가 역적으로 몰려 송씨들이 방천리 쪽으로 피신하였다가 점차 간동면의 뒷골, 도송리, 유촌리, 간척리로 이주해 와 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용호리가 제일 많은 송씨촌을 이루어 가고 있다.

    지명의 유래
    수몰 이후 용화산의 용(龍)자와 파로호의 호(湖) 자를 따와 [용호리]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용호리입니다.

    지명의 이야기
    파로호생태마을의 지명 중에는 "원수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밭 일을 하는 아낙이 어린 딸아이를 밭 둑에 두고 일을 하다가 그 딸을 호랑이가 물어가 그 호랑이를 원수로 삼았다 하여 그러한 지명이 생겼다고 합니다.

    파로호 지명의 유래
    파로호생태마을는 6.25전쟁 이전에는 북한에 속했던 지역으로 6.25전쟁의 많은 격전지가 있고 비목공원, 평화의 댐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호리와 접해있는 파로호는 원래 화천호였으나 6.25 전쟁 당시 중국군을 대승한 곳이라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물리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13. 풍산마을
    풍산마을 풍산마을 처녀고개 전설
    작성일
    2024-08-08
    풍산마을 처녀고개 전설
    작성일
    2024-08-08

    풍산리 고개 아래 마을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처녀는 한 마을에 사는 도령과 함께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도령은 장래를 약속한 처녀를 뒤에 두고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고, 한양으로 떠나던 날, 도령은 고갯마루에서 처녀와 이별하며, "과거에 급제하고 꼭 돌아오겠소.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돌아올 날을 기다려 주오." 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부터 처녀는 날이 저물면 도련님이 넘어 간 고갯마루에 올라 산굽이를 돌아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도련님이 올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장원급제를 하고 돌아오겠다던 도련님은 소식이 없고 어느덧 세월만이 흘러 봄이 가고 겨울이 갔습니다.

    도련님이 한양으로 떠난 다음 맞이한 첫봄에 처녀는 자기 키와 같은 소나무를 골라 버선목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렇게 기다리기 십년. 소나무는 겨울에도 흰 눈을 이고 키가 크고 줄기는 굵어졌으나 도련님의 꽃버선을 곱게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아 놓고 기다리는 처녀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처녀는 빛이 낡은 도련님의 꽃버선을 새로 만들어 소나무에 매달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실족하여 그만 절벽으로 굴러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해가 지는 산굽이의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처녀가 죽던 날, 도련님은 장원급제하여 돌아왔습니다.
    장원급제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온 도령에게 처녀가 죽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는 처녀가 죽은 자리에 쫓아가 보았으나 그 자리에는 초록색 물새가 처녀의 슬픈 넋인 양 슬피 울뿐이었습니다.
    도련님은 자기를 기다리다 죽어간 처녀를 위해 벼슬을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는 양지바른 곳에 처녀를 묻고 그 옆에 초가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농사일 외에는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이 일대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동리 이름을 '풍산리'라 짓고, 처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버선목을 매달았던 소나무를 성황으로 모시고 이 고개 이름을 '처녀고개'라고 지었습니다.


    6387f1f6888a7a83be857a91c3cb160d_1723088320_31.jpg
     

  14. 엄마품애마을
    엄마품애마을 엄마품애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8
    엄마품애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8

    고대리(高垈里)
    본래 군내면(양구)의 지역으로 높은 지대에 있으므로 고대(高垈)라 하였다.

    지명유래
    간촌(間村)【마을】→샛말
    고댓리【마을】고대리
    돌미【무덤】돌을 쌓은 무덤. 그 옆에 괸돌이 있음
    상-고대(上高垈)【마을】주랏말
    상-촌(上村)【마을】주랏말
    샛-말【마을】주랏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마을
    서낭-고개【고대】서낭당에 있던 고개
    수챗-골【골】샛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아랫-말【마을】고대리 맨 아래쪽에 있는 마을
    원텃-골【골】아랫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절-골【골】옛날에 절이 있던 골짜기
    주-랏【마을】→주랏말
    주랏-말〔상촌, 주랏, 상고대〕【마을】고대리 위쪽에 있는 마을
    지석묘【무덤】둘레11.69m, 넓이 13.8m, 높이1.77m의 규모 선사시대 무덤으로 화강암이다.

  15. 오미마을
    오미마을 오미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8
    오미마을 소개
    작성일
    2024-08-08

    방산면의 역사
    양구군 네면중 하나로 본래 고구려의 삼현현 (三峴縣 ) 또는 밀파혜 (密波兮 ) 의 지역인데 신라경덕왕 16 년 (757) 에 삼령현 (三嶺縣 ) 으로 고쳐서 양록군 (楊麓郡 ) 의 속현이 되고 고려때 방산현 (方山縣 ) 으로 고쳐 회양군 (淮陽郡 ) 에 딸렸다가 이조 세종 6 년 (1424) 에 다시 방원으로 재차 개칭하여 양구군 (楊口郡 ) 속하고 구후현을 없애고 방산면 (方山面 ) 이 되어 장평 (長坪 ), 칠전 (漆田 ), 현리 (縣里 ), 금악 (金岳 ), 오미 (五味 ), 천미 (天尾 ), 송현 (松峴 ), 고방산 (古方山 ), 건솔 (乾率 ) 의 9 개리를 관할하였으나, 1945 년 ~1950 년에 이르기까지 공산치하에 강점되어 통치를 받았으나 6.25 때 탄환하여 1954 년 3 월부터 군정을 실시하다.
    1954 년 11 월 17 일 행정권을 이야받아 6 개리 31 반이였으나 1971 년 송현리가 1.2 로 나누워 지면서 7 개리 31 개반을 개편되었다.

    오미리마을 지명의 유래
    단맛, 쓴맛, 신맛, 구수한 맛, 매운 맛의 다섯가지 맛을 고루 갖춘 의미에서 오미리라는 지역명이 유래되었으며, 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러니, 송서울, 도중골, 피모개, 중간말, 낭구니, 음텃골, 남밭, 안터를 병합하여 오미리라 불리우고 있다.

    마을 안의 지명의 유래
    가는골【골】 가늘게 생긴 골짜기
    각시 - 고개【고개】전에 어느 겨울에 각시가 가마를 타고 이 고래를 넘어가다 얼어죽었다 함
    개재 - 비냥【산】낭떠러지기가 진산 , 전에 개가 떨어져 죽었다 함
    굽둥 - 골【골】골이 구불구불하게 생긴 골짜기
    남바 - 치〔남전동〕【마을】쪽밭이 많았다 함
    남전 - 동 (湳田洞 ) 【마을】남바치
    낭 - 꾸미 (浪龜尾 ) 【마을】물가의 후미진 곳에 있는 마을
    도중 - 골【마을】움텃골 북쪽에 있는 마을
    매봉 - 재【산】모양이 매처럼 생겼다 함
    맷짓 - 녕【고개】이곳에서 매 (寐 ) 를 받았다 함
    벼락 - 바우【바위】전에 벼락을 맞았다는 바위
    송 - 서울【마을】도중골 북쪽에 있는 마을 . 서울에서 온 송씨가 살았다 함
    송서울 - 령【고개】송서울에 있는 고개
    수러니 - 고개【고개】오미리와 금악리 중간에 있는 고개
    안 - 대 (安垈 ) 【마을】안터
    안 - 터〔안대〕【마을】남바치 서쪽에 있는 마을 . 수입천 안쪽이 됨
    오미리 수러니〔오미리 술원동〕【마을
    중간말 북쪽에 있는 마을 . 금악리 수러니와 구별하여 오미리 수러니라 함
    오미리 술원동 (五味里 術元洞 ) 【마을】오미리 수러니
    오밋령〔오미령〕【고개
    오미 남쪽에 있는 고개 . 엣날 아들을 읽고 찾아 다니던 어머니가 이곳에서 얼어 죽었다 함
    오밋령 - 골【골】오밋령 바로 밑에 있는 골짜기
    음무 - 성 (蔭茂城 ) 【산】남바치 부근에 있는 산
    음텃 - 골〔은대곡〕【마을】화천군과 접경부근에 있는 마을 , 움집이 있었다 함
    은대 - 곡 (隱垈谷 ) 【마을】움텃골
    중간 - 말【마을】오미리와 피모재 사이에 있는 마을
    진 - 소【소】길쭉하게 생긴소
    진 - 양지【마을】지형이 길게 생긴 마을 . 양지쪽이 됨
    피모 - 개【마을】피나무가 많은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