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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불교만덕산성지 만덕산순례길 안내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만덕산순례길 안내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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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원불교만덕산성지 만덕산성지 초선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만덕산성지 초선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만덕산 초선터
    번호 : 성적 제11호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산 17-3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연락처

    만덕산 초선터는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산 17번지로 상달마을 불당골 만덕산 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덕암(처음 선을 났던 산제당을 만덕암이라 함)은 성수면 좌포리에 사는 김승지가 1910년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위해 지어 준 집입니다.
    비단장수 삼타원 최도화는 만덕산 미륵사 화주 노릇을 하면서 미륵사 넘어 만덕암에 내왕했습니다. 만덕암은 산신령 탱화를 모신 불당 1칸, 방 1칸과 부엌이 있는 3칸 기와집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 최초로 간 것은 원기 7년(1922) 12월경(음)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오창건. 송도성을 수행인으로 하여 만덕암에서 3개월여를 적공할 때 변산에서 귀의한 마령에 사는 전삼삼이 그의 아들 전음광을 데리고 와 귀의시키는 등 진안지방 교화는 물론 회상창립의 중요 인재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익산에 총부를 건설한 후 원기 10년 (음)3월에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 발표하고, 새 훈련법에 의하여 중앙총부에서 정기훈련법으로 (음)5월에 첫 하선夏禪과 (음)11월에 첫 동선冬禪을 났습니다. 이 동ㆍ하선을 새 회상 정기훈련의 원시元始라는 《원불교교사敎史》의 공식 기록과 함께 소태산 대종사 만덕산 만덕암에서 12명의 제자와 한 달 동안 났던 선禪은 장차 정기훈련을 시행하기 위한 구상과 준비 속에 이루어진 선禪인 만큼 교단사에 있어서 초선初禪의 의미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만덕산 만덕암은 소태산 대종사 → 정산종사 → 대산종사로 이어지는 새 회상 원불교의 3대 주법主法이 최초로 한자리에 만난 역사적인 곳입니다. 만덕암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빈 터만 남아있으며 암벽에는 법신불 일원상을 그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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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배치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배치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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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정기훈련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정기훈련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정기훈련터(定期訓練址)
    번호 : 교적 제2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익산에 불법연구회 중앙총부가 건설되자 혜산 전음광 일가가 제일 먼저 집을 건축하여 이사했습니다.
    당시 중앙총부 건물은 초가집인데 비해 전음광의 집은 반든한 기와집이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10년 봄에 정기훈련법을 제정 발표한 뒤 훈련법에 의한 첫 정기훈련(을축 하선乙丑夏禪, 6월 15일(음 5.6) ~ 9월 15일(음 8.6))을 개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앙총부에는 마땅한 훈련 장소가 없었으므로 전음광의 집 한쪽을 빌려서 임시선방으로 사용했습니다.
    전음광 가는 원기 47년 5월에 교단에서 매입하여 관리를 해오다가 건물의 노후화에 따라 원기 80년 기존 건물을 해체하고 그 터에 한옥 와가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음광 가의 본채가 있던 곳에 건축한 건물은 세심원, 창고터에 건축한 건물을 서정원이라 이름하였으며, 현재는 남자 교무들의 숙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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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익산총부 식당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익산총부 식당터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총부 식당터
    번호 : 교적 제3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신용동 344-2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익산 중앙총부 건설 당시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이 엿장사와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형편을 알게 된 오타원 이청춘이 원기 10년 농토 70여 두락을 희사하고 본격적인 공동체 생활 을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를 단행하였습니다.
    이청춘은 원기 11년 세탁부 아래에 터를 잡고(현 공덕원 자리) 가옥을 신축한 뒤 모친 김설상화와 함께 이사하고 출가를 단행했습니다.
    이청춘의 사가는 이후 이청춘이 전주지부 교무로 부임함에 따라 한동안 환자들의 치병실 등으로 이용되다가 한 차례 개축 과정을 거쳐 중앙총부에 근무하는 전무출신들의 식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건물이 퇴락하여 더이상 활용하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원기 80년 그 터에 한옥 와가를 신축하고 공덕원으로 명칭하였습니다.
    공덕원 건축 후 총부 호상소로 사용하다 내부시설을 사무에 적합하도록 재구성하고, 원기 94년부터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와 '대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감찰원사무처 사무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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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만석평사적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만석평사적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 만석평(萬石坪)
    번호 : 교적 제4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북일면 만석리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1924)에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 344-2번지에 새 회상의 전진기지인 원불교 중앙총부를 건설하고, 이듬해 총부 유지와 생활 대책으로 인근 동양척식회사 소유 답 3,000여 평을 빌려 그 수익으로 공부 비용과 운영 경비 일부를 충당하였습니다.
    당시 선진들은 낮에는 폭염 속에 농사를 짓고 밤에는 감각 감상과 심신 작용 처리 건을 토론 하며,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로 공부길을 지도받는 공동생활을 통하여 생활 종교의 토대를 굳건히 세웠습니다.

    만석평 소작농이 언제까지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는 않으나 원기 10년 오타원 이청춘이 70여 두락의 논을 교단에 희사하여 작농을 하게 되면서 그만둔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가 117장 '공덕탑의 노래' 중 2절 '익산 총부 건설 당시 엿장사이며 만석평의 밭 갈기도 눈물겨워라'는 당시의 어려웠던 정황을 노래 한 것입니다. 교단에서는 선진들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만석평 일대의 3,500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원기 104년 만성교당에 만석평 사적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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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대각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대각전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대각전(益山聖地 大覺殿)
    번호 : 성보 제5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이 최초로 모셔진 원불교 익산성지의 중심 건물입니다.
    원기 20년(1935) 복숭아밭이 있던 언덕에 터를 다듬어 지었는데 준공 당일 500여명의 대중들이 운집할 정도로 관심을 모았습니다.

    대중 집회를 위해 지어진 원불교 최초 건물로 완공과 함께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이루어지는 법회나 좌선 등 대부분의 대중 집회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당시 이리 시내에도 이처럼 큰 집회장소가 거의 없어서 인근 촌로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와 구경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건축 당시에는 84평으로 지어졌으나 원기 40년(1955) 개축 공사를 통해 현재와 같은 107평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재세 시 이곳에서 직접 법회 및 행사를 주관했으며 열반 후 발인식과 종재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뒤를 이은 정산 종사는 원기 33년(1948) 4월 27일 제20회 총대회 때 이곳에서 원불교 교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 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원기 92년(2007)과 97년(2012) 보수 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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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도치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도치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도치원(益山聖地 道治院)
    번호 : 성보 제6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원불교 익산성지에 최초로 지어진 건축물이자 불법연구회(원불교 교명 이전의 명칭)의 첫 사무실로 사용한 곳입니다.
    원기 9년(1924) 11월 완공되자 서중안 회장의 글씨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 간판을 기둥에 걸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건물이 완공되자 원래 이곳의 지명인 도치고개의 도치盜治를 도치道治로 고쳐 도치원이라 이름했습니다. 본래는 방이 셋 있었는데 서아실은 소태산 대종사가 거처하는 조실로 사용되었으며, 동아실은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방은 교무실을 겸하여 정산종사가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원기 13년(1928) 금강원이 완공되면서 소태산 대종사가 거처를 옮기자, 부인 선객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부인선원’으로 통칭하였다. 원기 56년(1971)부터 원기 62년(1977)까지는 중앙훈련원으로 사용해 오다가 원기 72년 건물의 노후화 되어 퇴락함에 따라 부득이 해체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깆추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익산성지에서 최초로 지어진 집이란 뜻에서 그 이름을 본원실本源室로 병용해 부르고 있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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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금강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금강원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금강원(益山聖地 金剛院)
    번호 : 성보 제7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원기 13년(1928)부터 원기 21년(1936)까지 원불교를 창시한 교조敎祖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가 주석한 건물입니다.
    예회, 단회, 동하선 결제, 대소회大笑會 때 소태산 대종 사가 설법을 한 곳이라 '설법전'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원기 21년 (1936) 백백교 사건 이후 신흥종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인접한 부인선원을 피해 조실을 영춘헌으로 옮기면서 여자 원로들의 머무르며 정양을 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원기 34년(1949) 교단 창립에 공헌한 원로들의 요양대책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원기 37년(1952) 정부의 허가를 받아 신용양로원을 설치하여 원불교 노인복지사업의 효시를 이루었습니다. 이곳에서 시작된 신용양로원은 이후 원불교의 대표적 복지기관인 원광효도마을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신용 양로원이 원기 40년 원사를 지어 이전을 함에 따라 다시 여지 원로들의 만년 수양지로 활용되었으며,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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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원불교익산성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종법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익산성지 종법실
    작성자
    두레박
    작성일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종법실(益山聖地 宗法室)
    번호 : 성보 제8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22년(1937)부터 원기 28년(1943)까지 7년간 주석한 건물입니다.
    원기 12년(1927) 교세의 확장에 따라 여제자들을 위한 부인선원婦人禪院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신축 당시에는 맞배지붕 3칸 겹집이었으나 그 이듬해인 원기 13년(1928)에 좌우에 한 칸씩을 더 달아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꽃피는 봄날에 지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영춘원迎春院'이라 불렀으나 소태산 대종사가 금강원에 주석하면서 격을 낮추어 '영춘헌迎春軒'이라 불렀습니다.
    건축 추진 당시에는 부인선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막상 준공이 되자 도치원을 부인선원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사무실과 남자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원기 21년(1936) 백백교 사건 이후 신흥종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무실이 부인선원가 떨어진 구정원으로 옮겨가면서 소태산 대종사가 거처하는 조실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이곳에 상주하면서 전법교화에 힘썼습니다.
    원기 56년(1971) 바로 옆에 종법원을 신축되면서 조실이 그곳으로 옮겨가자 구조실이란 명칭으로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내부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초상화 우측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친필 사은四恩과 좌측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게송偈頌이 써 붙어있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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