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쾰른교당 쾰른교당 안내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쾰른교당 안내-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법인명 : 재단법인 일원 원불교 선센터
교당명 : 원불교 쾰른교당
주임교무 : 일타원 이명희 교무 /보좌교무:제타원 이원조(이진수)교무
주소 : STIFTUNG ILWON Wonbuddhistisches Meditationszentrum Igeler Muhle 1, 51465 Bergisch Gladbach, GERMANY
Tel. 02202-9790751(한국에서:002-49-2202-9790751)
Fax. 02202-9790753
연 혁 : 2006년(원기91년) 3월 일 법인설립인가
건물계약 : 2006년 6월 23일
건물 등기 이전 : 2006년 8월 23일(?)
리모델링 공사 : 2007년 2월 -11월까지 개보수
추가보수 공사 : 2008년 4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전망 : 독일의 문화예술· 불교인구의 중심도시 쾰른의 거점
북유럽 교화의 전진 기지 등 유럽 교화의 중요 시설
시에서 합력 운영하는 생태보존가치 구역
본토인 중심교화
한국인 방문객과 창립회원의 중요 숙소
젊은이들을 위한 유스호스텔 운영
주요사업 : 선센터 운영
갤러리 및 회의실 대여
현황 : 대법당/ 소법당
객실 5실, 생활관 4실
갤러리 <Fur Schone Harmonie> 3실-> <Armdaum>으로 명칭변경.
문화원 서실1, 문화 학습실(다실)1
주방시설2 : 한식, 독일식
위치 : 쾰른역, 쾰른성당과 25분 거리(자동차로)
프랑크푸르트공항과 2시간 30분 거리
사용 안내
대법당 : 대집회 가능(사용 요금 별도)
소법당 : 회의실로 사용 가능(사용 요금 별도)
객실 2인실 : 1박(조식 제공) 50유로 -> 42유로로 가격 조정
객실 1인실 : 1박(조식 제공) 65유로 -> 47유로로 가격 조정
갤러리 <Fur Schone Harmonie> 및 회의실
갤러시 사용시 문의 바람
문화원 서실1, 문화 학습실(다실)1 -
원불교부산울산교구 원불교 부산울산교구 역사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5
원불교 부산울산교구 역사-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5
1929년(원기14년) 이타원 장적조 선생이 부산에 발을 디뎌 일원대도의 법종자를 심기에 일구월심 노력하다가 하단의 래산 양원국 교도를 만나 그의 댁에 머물면서 동지를 모으고 대종사의 대도정법을 선포하였다. 이에 부산과 경남북 지역에 원불교 교법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31년(원기16년) 이후 교도들이 40여명에 이르렀고 양원국, 임현기화, 이성주화, 윤문선, 김성명화, 임정술 등이 교당(회관) 창설을 염원하더니 각자 성의대로 의연금 400여원을 수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산시 서구 하단동에 건평 23평의 초가 2동 8칸을 매입하여 불법연구회 ‘하단(부산)출장소 교당’ 간판을 걸고 교화를 시작하였다. 동년 8월(음력)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와 경산 조송광 회장이 부산에 오시어 10여일 체류하였고, 이 기간 입회한 사람은 동년 8월 13일 7명, 8월 14일 5명, 8월 16일 6명, 8월 18일에는 19명에 이른다. 이타원 장적조 선생이 원기15년 부산에서 교화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원기16년(1931년) 8월 18일까지 입회 회원 수는 총 80명이었다. 이들은 불교 신도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주류를 이루고, 지역별로는 남부민정(남부민동의 옛 이름)과 사하면 하단에 사는 교도들이 많았다.
1932년(원기17년) 원기17년 4월 8일 부산지방 초대 교무로 삼산 김기천 종사께서 부임하였으며, 이후 교세는 날로 번창하였고, 부산시내 남부민에 사는 회원들은 하단까지 10㎞가 넘는 거리를 내왕하기가 불편하므로 따로 교당을 신설하게 되었다.
1934년(원기19년) 원불교 남부민교당(남부민 출장소)을 설립하고 교무 요청을 한 바, 융타원 김영신 교무가 초대 교무로 부임하였다. 원기19년(1934년) 9월 19일(음력) 남부민교당 법당 신축 낙성 기념식에 임석하시기 위하여,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께서 부산지방에 행가하셨는데, 기념식 후 익산총부로 돌아가시는 길에 김통제화, 이삼중행, 이종신, 김삼도화, 이영두 등 45명의 알뜰한 새 제자를 얻으셨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에 남부민교당 융타원 김영신 교무를 초청하여 법회(야회)를 보는 한편 초량에도 교당의 개설을 서로 논의하였다.
1935년(원기20년) 원기20년 6월 6일부터 12일까지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모시고 초량초등학교를 빌려 하루에 2시간씩 교리강습을 실시하였다. 이에 크게 법풍을 진작하니 초량교당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1936년(원기21년)~1961년(원기46년) 원기21년에 초량동 967번지 대지 147평을 매입, 와가 1동 14간의 아담한 법당을 신축하여 원불교 초량교당(초량지부)은 일원대도의 법음을 전하는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부산(남부민)교당과 초량교당을 기반으로 교세의 발전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후 초량교당을 연원으로 원기32년에는 다대교당을, 원기38년에는 부산진교당과 서면교당을, 원기41년에는 대신교당을 신설하였고, 원기40년에는 부산진교당을 연원으로 동래교당이 신설되었다.
1962년(원기47년)~ 1971년(원기56년) 대산 김대거 종사가 종법사로 취임한 후 원기47년(1962년)에 영도교당과 구포교당을 비롯하여 매년 교당이 신설되었으며, 반백년 기념대회가 열린 원기56년(1971년)에는 3개 교당이 신설되었다. 당시 부산지역에 신설된 교당은 18개 교당이었다.
1972년(원기57년)~ 1976년(원기61년) 원불교 반백년기념대회 이후 부산지역의 교당은 급속히 늘어났다. 원불교 부산교구에서 매년 2~3개의 교당이 불어나기 시작하여 원기62년(1977년)에는 4개 교당이, 원기66년(1981년)에는 5개 교당이 신설되었다. 이렇게 교당이 늘어나서 원기72년(1987년) 12월 말을 기준하여 부산지역 시내 11개구에 44개 교당과 부산 인근 경남지역인 김해시 일원과 울산시와 울주군 양산군을 포함 8개 교당을 확보하여 총 52개 교당이 되었다. 이들 교당은 법적 근거에 의한 특별한 체계나 조직의 밑받침이 없이 상호간 필요에 의해서 잠정적인 연합 활동을 벌여왔었다.
1977년(원기62년)~ 1978년(원기63년) 원기62년(1977년) 원불교 교단은 교구제를 시행하였고, 이에 따라 제1대 항타원 이경순(경남교당. 現 부산교당) 교구장이 취임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교구 연합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실상으로 교구 체제정비를 위한 교구교의회 창립 및 봉공연합회 발족, 청년연합회, 학생연합회, 어린이 연합 활동 등이 시작되었고, 교구 어머니 성가대가 발족되기도 했다.
1979년(원기64년)~ 1985년(원기70년) 원기64년(1979년)에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던 부산교당 건축 문제를 앞두고 부산교구 전 교역자와 전 교도가 합심하여 건축에 협력할 것을 다짐, 건축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항타원 이경순 교구장의 순직으로 제2대 교구장에 균타원 신제근 교구장이 부임하게 되었고, 원기65년(1980년) 4월 8일 부산교당 봉불식을 마치고 교구청과 부산교구사무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86년(원기71년) 이 무렵 부산교구는 50개의 교당에 이르러 있었고, 교단은 다시 교구 행정의 변화를 시행하여 기존 14개 교구를 지역적 특성에 따라 20개 교구로 분할하였다. 이때 부산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게 되었는데, 동부지역을 동부교구로 하고 서부지역을 서부교구라 하여 동부교구에 28개 교당, 서부교구에 24개 교당을 소속시켰다. 서부교구의 교구청은 신창동 소재 기존 교구사무소를 그대로 하고 교구장에 균타원 신제근 교무가 부임하고, 동부교구는 동래교당을 교구청 소재지로 하여 초대 교구장에 건타원 김대관 교무가 부임하였다.
1995년(원기80년)~2002년(원기87년) 원기80년(1995년), 교단은 다시 국가의 행정구역 변경에 따른 교구 제도를 개편했는데 부산의 동부교구와 서부교구를 부산교구로 통합하였다. 내용을 보면 부산광역시와 양산시, 울산시를 묶어 부산교구로 하고, 김해지역은 경남교구로 편입되었다. 통합된 대교구제 부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교산 이성택 교무가 부임하였다. 이성택 교구장은 ‘삼하나 운동’을 전개하여 교화 활성화를 기하였으며, 그 기운으로 원기85년(2000년)에 좌산종법사를 모시고 ‘2000년 부산 대법회’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부산원음방송국의 개국과 금곡청소년수련관을 수탁하여 부산 지역에 원불교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 올려놓았다.
2003년(원기88년)~2006년(원기91년) 원불교 부산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심타원 박순정 교무가 재임하였다. 각 가정 앞에 원불교 문패붙이기 운동과 감사생활, 낙원가정 스티커 붙이기 운동 등 가족교화에 중점을 두고 교화를 전개하였다. 이즈음 교단은 국가로부터 군종장교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 즉시 부산교구에 군교화의 문을 열어 울산지역과 언양지역에 군 교화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2007년(원기92년)~2012년(원기97년) 원불교 부산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월산 김일상 교무가 재임하였다. 부임 당년에 교구 임시기획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화 컨설팅을 의뢰하여 원기100년을 향한 교구의 교화방향을 설정하였다. 교화방향의 핵심은 교화단 교화와 지역공동체교화(지구교화)였다. 또한 미래 교화를 준비하는 조직으로 기획위원회 ․ 교화후원회 ․ 교구청 건립추진위원회를 동시에 출범시켰다. 이어 교화 성장을 실현시키는 정신운동으로 ‘4ㅎ정신 - 해야 한다 ․ 하면 된다 ․ 할 수 있다 ․ 행동한다’ 을 제시했다. 주된 사업으로 교화전략교당 운영, 교당별 비전수립추진, 단장 서원단 운영, 3040세대 교화, 미자립교당 면모 갖추기(신평교당, 가야교당, 만덕교당, 괴정교당 신축), 봉공회관 건립을 통한 대사회 교화, 하단성적지 순례 및 복원, 지구교화협의회 운영 등을 진행하였다.
2013년(원기98년)~ 2018년(원기103년) 원불교 부산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숙타원 정숙현 교무가 부임하였다. 원기100년까지 수립된 부산울산교구의 정책과 비전을 계승하는 동시에 재가 ․ 출가의 소통과 합력, 교화 역량 강화, 지역 교화와 교도 자녀 교화, 원불교100년 성업 동참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원불교100년성업 기념대회에 부산울산교구에서 3,476명이 상암월드컵경기장에 참석하여 거룩한 기념대회에 동참하였고, 어깨동무 법회, 입교 연원 우수자 포상의 정책을 진행하였다. 원기102년 6월 11일 영남권 최초의 교당인 원불교 하단교당 부산역사기념관을 준공하였다. 부산울산교구와 영남권 교화의 뿌리가 되는 교단사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2014년 2월 6일에는 원불교 부산교구에서 원불교 부산울산교구로 교구 명칭을 변경하였다.
2019년(원기104년) 원불교 부산울산교구 제5대 교구장으로 현산 안인석 교무가 부임하였다. ‘원불교 2세기! 새롭게 일어서는 부산울산교구’를 교화 슬로건으로, 교구 자치역량 내실 강화, 지구 공동교화체제 확립, 현장교화 지원강화, 특성교화 육성을 핵심정책으로 교화비전을 수립하고 교화를 진행하고 있다. -
대한불교조계종 약천사 약천사 전각 배치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4
약천사 전각 배치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4
-
대한불교조계종 약천사 약천사 대적광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4
약천사 대적광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4
큰법당은 약천사의 중앙에 위치하였으며, 약천사를 대표하는 전각이다. 서귀포 앞 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일 법당으로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 큰법당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의 웅장한 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금산에 있는 금산사 미륵전의 3층 구조를 응용하여 설계되었다. 외부에서 볼 때는 3층이지만 내부의 가운데는 천장까지 트여져 있어 웅장함을 더한다. 내부의 둘레는 4층의 구조로 되어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셔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명칭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 된다.
주불로 모셔진 비로자나부처님은 백두산에서 가져온 목재로 조성되었다. 부처님은 높이가 4.5m나 된다. 목불로서는 한국에서 가장 큰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의 광배에는 53분의 작은 부처님이 모시어져 있다. 이것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구법 과정에서 찾아가 만난 53선지식을 의미한다. 비록 경에는 선지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들 모두 불보살의 화신인 까닭이다.
좌보처는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약천사의 명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약천사 절터에는 예로부터 약수물이 흐르는 샘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영험을 보았는데, 약사여래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러한 질병 치료의 영험이 계속 이어져서 많은 중생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구원되기를 서원하면서 약사여래불을 모시게 되었다.
우보처로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불을 모시게 된 것은 2가지 연유가 있는데, 첫번째는 약천사가 위치한 서귀포(西歸浦)라는 명칭이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귀의(歸依)하고자 하는 불자들의 서원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이곳 서귀포에 지어진 약천사에 아미타불을 모셔서 많은 불자들의 서원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데 뜻이 있다.
두번째 연유는 약천사 불사를 원만히 성취하고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여 극락정토를 이룩하겠다는 혜인스님의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품이 깨끗한 것이야 말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다 -자성미타(自性彌陀)’ 좌우보처 부처님은 모두 청동으로 조성되었다.
큰법당 내부 4개의 기둥에는 청룡과 황룡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여의주를 다투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약천사가 완성되기까지 국내외의 수많은 불자들이 불사를 위해서 아낌없이 보시한 공덕을 찬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모든 부처님을 단순하게 금으로만 개금하고 있는데 약천사에서는 경전에 근거하여 부처님께서 수하고 계시는 가사를 금란가사로 무늬를 수놓았다. 후불목탱화는 약천사의 또 하나 큰 특징이다. 나무로 조성되고 채색된 이러한 목탱화 조성은 근래에 와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약천사는 문경 대승사에 보물로 모셔진 후불목탱화를 더욱 계승하고, 발전시켜 후불목탱화를 조성하여 모셨다. 닫집은 약천사 큰법당에는 각 부처님마다 3층 구조로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닫집은 일본의 법당과 확연하게 구분짓는 우리나라 법당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우리불교 전통 양식을 더욱 확연히 나타내기 위해, 전통에 맞게 닫집을 만들어 부처님을 장엄하였다.
불단에 자리한 증명법사단은 약천사 큰법당의 3단으로 된 불단 윗자리에 계를 설할 때나, 큰 법회를 할 때 증명법사스님들이 등단하여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있다. 이것은 한국 법당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로서 약천사는 어느 사찰보다도 범망경 보살계 수계식을 비롯한 모든 불교 전통 수계의식을 엄숙하고 장엄하게 치를 수 있게 법당이 잘 준비되었다. 불단 아래에는 많은 선망 조상들의 위폐들이 모셔져있다. 혜인스님께서는 부모은중경을 즐겨 법문하시는데, 조상들과 부모님의 위폐를 잘 모시고 때에 맞추어 재를 갖추어 올리는 것은 우리의 효심을 증장시키는 미풍양속이기 때문이다.
8만불보살은 큰법당 2층 회랑에 모셔져 있다. 여기에 모셔진 부처님은 많은 불자들이 동참하여 원불로 모신 부처님이다. 약천사 불사에 얼마나 많은 불자들이 동참했는지 짐작케 한다. 3층에는 4개의 윤장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많은 불자들의 인등을 밝히고 있다. 큰법당의 높이는 29m이고, 면적은 지하 강당을 포함해서 1,043평(3,380.84㎡)이다. 법당 내부의 마루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25m이다. 1층 마루 바닥에서는 부처님의 좌대가 너무 높아 바로 보기가 힘들고, 2층 또는 3층에 올라가서 참배하면 그 웅장함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