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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공회당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공회당-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공회당(益山聖地 公會堂)
번호 : 성보 제9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원기 14년(1929) 양잠실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은 건물로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감역해 지은 건물입니다. 하지만 양잠 시기와 동하 선기가 겹치는 관계로 양잠실로 사용되기보다는 대중 집회와 동하선東夏禪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듬해인 원기 15년 맞은편에 양잠실을 새로 건축하자 대중집회 장소인 공회당으로 이름을 명명하고 원기 20년(1935) '대각전'이 건축되기 전까지 동선, 하선, 예회, 염불, 회화, 강연 등 주요 집회를 모두 이곳에서 열었습니다.
일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으로 일식 목구조가 주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함석 지붕에 돌출 현관을 둔 것이 특징입니다. 9간 통방 건물로 한 때는 구룡헌九 龍軒이라 불렀으며 설법대전說法大殿이란 편액을 걸기도 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와 그 후계자인 정산 종사가 가장 많은 법문을 설한 곳이기도 합니다.
원기 31년(1946)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유일학림'이 개원할 당시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였고, 원기 41년(1956)부터 원기 75년(1990)까지 중앙선원中央禪院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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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송대
-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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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익산성지 송대-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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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송대(益山聖地 松臺)
번호 : 성보 제10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85년(2000) 7월 6일
소태산 대종사성탑 좌측에 있는 건물로 원기 26년(1941) 소태산 대종사의 휴양과 정전 집필을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3칸 겹집으로 당시만 해도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전신)의 중심 건물들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하고 조용한 소나무 숲에 세워졌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한때 중환자들의 간병실로 사용하였고, 원기 34년(1949) 정산 종사의 유시를 받아 교단 기관지인 원광사를 설립하면서 이곳에 원광 편집실을 두고 교단의 대표적 기관지인 '원광圓光'을 창간하였습니다.
정산종사는 그 창간호에 '일원지광 편조시방一圓之光 遍照十方' 즉 '무엇이나 진실한 일은 아무리 없애려 해도 필경은 있어지는 것이요, 거짓 된 일은 아무리 있으려 하여도 필경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는 휘호를 내려 창간을 축하했습니다.
원기 56년(1971) 2월 영구 보존 건물로 지정되었으며 원기 85년(2000) 보수 정비해 현재는 기도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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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성탑
-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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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익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성탑- 작성자
-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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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명칭 : 소태산 대종사 성탑(少太山大宗師聖塔)
번호 : 성보 제11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위업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성해聖骸가 모셔져 있습니다.
원기 28년(1943)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일경日警의 간섭으로 인해 부득이 장례식을 간소화하고 성해 또한 화장火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장한 성해는 49일 동안 조실에 안치하였다가 49재 후 북일면 금강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는데, 해방이 되자 이듬해인 원기 34년(1949) 이곳으로 모셔와 성탑을 조성하고 성해를 안장했습니다.
성탑은 황등 화강석으로 조성하여 연화를 양각한 기단 위에 연화대석을 받치고 원석圓石을 올려 그 안에 성해를 봉안한 후 5층 탑신과 개석을 쌓고 '大宗師聖塔'이라고 각명하였습니다.
원기 72년(1987) 성업봉찬 사업의 일환으로 주변을 정비하고 소태산 대종사 십상, 사은四恩 친필과 게송偈頌을 부조로 장엄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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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성비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소태산 대종사 성비-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소태산 대종사 성비(少太山大宗師聖碑)
번호 : 성보 제12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의 생애와 업적을 길이 추모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원기 38년(1953) 세운 비석입니다. 제명은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 병서圓覺聖尊少太山大宗師碑銘竝序'로, 소태산 대종사가 이 땅에 출현한 까닭과 구도 및 대각, 그리고 구세 경륜을 펴나간 생애와 업적이 담겨있습니다. 비문은 후계 종법사인 정산 종사가 지었으며 글씨는 강암 송성용이 썼습니다. 충청남도 보령에서 가져온 빗돌 사면에 음각으로 각자를 마치고 원기 38년(1953)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 열반일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명병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병서(圓覺聖尊少太山大宗師碑銘竝序)
대범大凡, 천지天地에는 사시四時가 순환循環하고 일월日月이 대명代明하므로 만물萬物이 그 생성生成의 도道를 얻게 되고 세상世上에는 불불佛佛이 계세繼世하고 성성聖聖이 상전相傳하므로 중생衆生이 그 제도濟度의 은恩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자연宇宙自然의 정칙定則이다.
옛날 영산회상靈山會上이 열린 후後 정법正法과 상법像法을 지내고 계법시대季法時代에 들어와서 바른 도道가 행行하지 못하고 삿된 법法이 세상世上에 편만遍滿하여 정신精神이 세력勢力을 잃고 물질物質이 천하天下를 지배支配하여 생령生靈의 고해苦海가 날로 증심增深하였나니, 이것이 구주救主이신 대종사大宗師께서 다시 이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하시게 된 기연機緣이다.
대종사大宗師의 성姓은 박씨朴氏요, 휘諱는 중빈重彬이요, 소태산少太山은 그 호號이시니, 석존釋尊 기원紀元 2918년二千九百十八年 신묘辛卯 3월三月 27일二十七日에 전라남도全羅南道 영광군靈光郡 백수면白岫面 길룡리吉龍里에서 탄생誕生하시었다. 부父는 박회경朴晦傾, 모母는 유정천劉定天이시요,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後裔이시다.
대종사大宗師 유시幼時로부터 기상氣像이 늠름凜凜하시고 도량度量이 웅대雄大하시며 모든 사물事物에 매양每樣 사색思索의 정신精神이 많으시고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천實踐하는 용단력勇斷力이 있으시었다. 9세시九歲時에 우주宇宙의 자연현상自然現象을 보시고 큰 의심疑心이 발發하시었으나 그 의두疑頭를 풀기로 한즉 생각이 막연漠然하여 도저到底히 구경처究竟處를 해득解得하기가 어려우매 대종사大宗師의 우울憂鬱하신 심경心境은 날이 갈쑤(수)록 깊어 지시사 처음에는 산신山神에게 다음에는 도사道士에게 의뢰依賴를 구求하여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필경畢竟은 주소일념晝宵一念이 오직 한 의심疑心 뿐이므로 점점漸漸 계교돈망計較頓忘하는 삼매三昧의 경계境界에 드시었으니 이 사이에 생활生活의 곤란困難과 심신心身의 피로疲勞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으시었다.
26세二十六歲 되시던 병진丙辰 3월三月 26일二十六日 이른 아침에 동천東天의 서광曙光을 보시고 정신精神이 문득 상쾌爽快해 지시며 적세積歲에 맺혔던 의두疑頭가 풀리기 시작하여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시었다.
대종사大宗師 대각大覺을 이루신 후 전성前聖의 증오처證俉處를 참고參考하기 위爲하여 제가諸家의 경전經傳을 열람閱覽하시다가 금강경金剛經을 보시고 가라사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진실眞實로 성중성聖中聖이라” 하시고 이에 부처님에게 연원淵源을 정定하시고, 다시 현現 시국時局을 관찰觀察하시매 세도世途가 이미 위기危機에 당當하여 그 구제사업救濟事業이 시급時急함을 생각하시고 처음 9인제자九人弟子를 얻으사 최초법어最初法語를 설說하신 후後 영육쌍전靈肉雙全의 기초基礎를 닦기 위爲하여 먼저 저축조합貯蓄組合을 설치設置하사 길룡리吉龍里 해면海面의 간석지干潟地를 개척開拓하시고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精神을 세우기 위爲하여 기도祈禱 서원誓願을 명命하시었던 바 9인九人이 한 가지 혈인血印의 신성信誠을 바치었다.
기미己未 8월八月에 2, 3제자二三弟子를 다(데)리시고 석장錫杖을 부안扶安 봉래산蓬萊山에 옮기시어 5년간五年間 주재住在하시며 교리제도敎理制度의 초안草案을 대략大畧 마치신 후後, 갑자甲子 4월四月에 하산下山하시어 총부總部를 차此 신룡리新龍里에 건설建設하시고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라는 임시명칭臨時名稱으로 교문校門을 공개公開하사 제자弟子 수십數十 인人으로 더불어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간고艱苦한 생활生活을 하여가며 교리훈련敎理訓練을 시작하시었나니 교리敎理의 대강大綱은 일원一圓을 최고最高 종지宗旨로 하여 이를 신앙信仰의 대상對像과 수행修行의 표본標本으로 하는 동시同時에 천만사리千萬事理를 다 이에 통일統一하게 하시고, 사은사요四恩四要를 윤리倫理로 하여 종전從前에 미달未達한 모든 윤리倫理를 다 통通하게 하시고, 삼학팔조三學八條를 수행修行으로 하여 종전從前에 편벽偏僻된 일체一切 수행修行을 병진竝進하게 하시며, 다시 영육쌍전靈肉雙全 이사병행理事竝行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등等 대체大諦를 밝히사 사통오달四通五達의 원융圓融한 도道로써 모든 법法을 간이능행簡易能行케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교리훈련敎理訓練을 실시實施하시는 일방一方, 다시 생활제도生活制度의 개선改善에 착수着手하사 허례산삭虛禮刪削과 미신타파迷信打破며 자작자급自作自給과 수지대조收支對照 등等 방법方法으로써 새로운 사업기초事業基礎를 쌓으사 춘풍추우春風秋雨 20여二十餘 년年에 숙야근간夙夜勤懇하시와 일정日政의 압제壓制와 싸워가며 모든 난관難關을 극복克服하시어 교단건설敎團建設에 오로지 심혈心血을 다 하시더니 무상無常이 신속迅速하여 계미癸未 5월五月 16일十六日에 대중大衆을 모으시고 생사진리生死眞理의 대법문大法門을 최후最後로 설說하신 후後 6월六月 1일一日에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시니 세수世壽는 53五十三이요, 개법開法이 28년二十八年이었다. 때에 도중徒衆들은 반호벽용攀號擗踊하여 그칠 줄을 몰랐고, 일반사회一般社會의 차탄嗟嘆하는 소리 연連하여 마지아니하였으며, 허공법계虛空法界와 삼라만상森羅萬像(象)이 다 같이 오열嗚咽하는 기상氣像을 보이었다.
그후後 교단敎團은 한갈(결)같이 선사先師의 유업遺業을 이어 시국時局의 만난萬難을 겪으며 대중大衆이 일심동진一心同進하던 중中 을유乙酉 8월八月에 민족民族이 해방解放이 되자 신생新生 국운國運의 발전發展과 아울러 교세敎勢가 점차漸次 확창擴昌되매 병술丙戌 4월四月에 교명敎名을 원불교圓佛敎라 정定하고 이를 천하天下에 공시公示했다.
오호嗚呼라, 대종사大宗師께서는 일찌기 광겁종성曠劫種聖으로 궁촌변지窮村邊地에 생장生長하시어 학문學問의 수습修習이 없었으나 문리文理를 스스로 알으시고, 사장師長의 지도指導가 없었으나 대도大道를 자각自覺하시었으며, 판탕板蕩한 시국時局을 당當하였으나 사업事業을 주저躊躇하지 아니하시고, 완강頑强한 중생衆生을 대對할지라도 제도濟度의 만능萬能이 구비具備하시었으며, 기상氣像은 태산교악泰山喬嶽 같으시나 춘풍화기春風和氣의 자비慈悲가 겸전兼全하시고, 처사處事는 뇌뢰낙락磊磊落落하시나 세세곡절細細曲節의 진정眞情을 통通해 주시며, 옛 법法을 개조改造하시나 대의大義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時代의 병病을 바루시나 완고頑固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萬法을 하나에 총섭總攝하시나 분별分別은 오히려 역력歷歷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시용施用하시나 본체本體는 항상恒常 여여如如히 들어내사, 안으로 무상묘의無上妙義의 원리原理에 근거根據하시고, 밖으로는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지류支流까지 통通하시어 일원대도一圓大道의 바른 법法을 시방삼세十方三世에 한限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바 백억화신百億化身의 여래如來시요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시라, 영천영지永天永地 천만겁千萬劫에 무량無量한 그 공덕 功德을 만일萬一이라도 표기標記하기 위爲하여 이 돍(돌)을 세우고 이 명銘을 지어 가로대(되),
월약종사 광겁종성 응화기연 구세도중
粤若宗師 曠劫種聖 應化機緣 救世度衆
자수자각 경로간난 건교사업 평지조산
自修自覺 經路艱難 建敎事業 平地造山
일원대도 만법지모 교문통달 중성공회
一圓大道 萬法之母 敎門通達 衆聖共會
입팔년간 숙야근간 천만방편 무량법문
卄八年間 夙夜懃懇 千萬方便 無量法門
법륜부전 불일중휘 인천함대 육중동귀
法輪復轉 佛日重輝 人天咸戴 六衆同歸
수긍삼제 횡변시방 우로지택 일월지명
竪亘三際 橫遍十方 雨露之澤 日月之明
무변공덕 표이사석 영천영지 모앙무극
無邊功德 標以斯石 永天永地 慕仰無極
圓紀 三十八年 四月 二十六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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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정산종사성탑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정산종사성탑-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정산 종사 성탑(鼎山宗師聖塔)
번호 : 성보 제13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 종사(1900~1962)의 성해聖骸를 봉안한 탑입니다. 원기 47년(1962) 1월 24일 정산 종사가 열반하자 화장한 후 송대에 임시 안장했다가 원기 56년 현 원불교역사박물관 입구에 탑을 조성하고 봉안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성과 상징성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원기 73년(1988) 소태산 대종사 성탑 동편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새로 조성한 뒤 탑 중앙 원석圓石에 성해聖骸를 모시고 '원불교 전서'를 함께 봉안하였습니다. 탑의 좌우로 삼동윤리상三同倫理相과 화해제우상花海際遇相을 동銅 부조 작품으로 붙이고, 정산 종사의 친필인 영주靈呪와 이산 박정훈 교무가 쓴 게송을 새겼다.
'정산종사성탑명鼎山宗師聖塔銘은 당시 종법사인 대산 종사가 짓고 박정훈 교무가 글을 썼다. 성탑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산종사성탑명(鼎山宗師聖塔銘)
대범大凡, 하늘은 땅이 있어 그 도道를 다하고 태양은 달을 두어 그 공功을 더하나니, 대종사大宗師께옵서 대각大覺을 이루신 후後 새 세상世上의 새 회상會上 을 세우시고자 시방十方을 응應하여 수위단首位團을 조직組織하실 제 정산종사鼎山宗師를 기다려 그 중앙위中央位를 맡기시고 “내가 만나려던 사람을 만났으니 우리의 대사大事는 이제 결정決定 났다.” 하시었으며, 이로부터 지중至重 한 부자父子의 결의結義로 한결같이 신봉信奉과 보필輔弼의 소임所任을 다 하시매 “나의 마음이 곧 그의 마음이 되고 그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 하시었으니, 이것이 정산종사鼎山宗師께서 대종사大宗師의 법法을 이어 받으신 기연機緣이다.
정산종사鼎山宗師의 성姓은 송씨宋氏요, 법명法名은 규奎요, 정산鼎山은 그 법호法號이시며, 원기圓紀 전前 16년十六年 경자庚子 8월八月 4일四日에 경북慶北 성주星州 소성동韶成洞에서 나시니 부父는 송벽조宋碧照 모母는 이운외李雲外이시다.
어려서 수도修道에 발심發心하시어 강호江湖와 산곡山谷에 기도祈禱도하시고, 초당草堂에 정좌靜坐하여 심공心功도 쌓으시며 스승 찾아 각지各地에 방황彷徨도 하시다가 19세十九歲 되시던 원기圓紀 3년三年 무오戊午에 전북全北 정읍井邑 화해리花海里에서 대종사大宗師의 친영親迎을 받아 이 회상會上 창립創立의 중추中樞가 되신 후後, 영산방언靈山防堰이 끝나매 8인八人 동지同志와 함께 법인성사法認聖事를 마치시고 변산邊山과 익산益山에서 교리제정敎理制定을 도우시며 각처各處의 숙겁법연宿劫法緣을 두루 찾으시고 영산靈山에서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시는 한편 새 회상會上의 창건사創建史를 기초起草하셨다.
계미癸未 6월六月에 대종사大宗師께서 열반涅槃하시매 망극罔極한 가운데 법통法統을 이어 험난險難한 시국時局을 극복克服하시고 8ㆍ15八ㆍ一五 광복光復을 맞아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을 전개展開하시며 대중大衆이 아직 몰라 뵙던 대종사大宗師를 주세불主世佛로 높이 받들고 교명敎名을 확정確定하사 천하天下에 공시公示하시며 교헌敎憲을 반포頒布하사 교단운영敎團運營의 대본大本을 세우시고 6ㆍ25六ㆍ二五 전란戰亂 중中에서 의연毅然히 대중大衆의 갈 길을 인도引導하시며 교재정비敎材整備 기관확립機關確立 정교동심政 敎同心 달본명근達本明根의 사대경륜四大經綸으로써 교단만대敎團萬代의 기초基礎를 더욱 다지시는 한편, 동원도리同源道理 동기연계同氣連契 동척사업同拓事業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제창提唱하시어 세계世界의 모든 종교宗敎, 모든 생령生靈, 모든 사업事業이 대동화합大同和合하여 다함께 일원주의一圓 主義를 실현實現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일러주시고 몸으로 보여주시고 마음으로 전하여 주시다가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하신 후後, 원기圓紀 47년四十七年 1월一月 24일二十四日 거연遽然히 열반涅槃하시니 세수世壽는 63六十三이요 법랍法臘은 45년四十五年이셨다.
오호嗚呼라! 정산종사鼎山宗師는 한限없는 세상世上을 통通하여 대종사大宗師를 받들고 제생의세濟生醫世의 대업大業을 운전運轉하실 제 신의信義는 고금古今을 일관一貫하시고 경륜經綸은 우주宇宙를 관통貫通하시며 시국時局의 만난萬難 중中에서도 대도大道를 이어받아 드러내시고 흉흉洶洶한 세도인심世道人心 속에서도 대자대비大慈大悲로 모든 생령生靈을 두루 안아 길러주시며 새 질서秩序를 갈망渴望하는 세계世界를 향向하여 일원세계一圓世界 건설建設의 큰 길을 높이 외쳐 주시었으니 후래제자後來弟子로서 묵묵黙黙히 우러러 뵈올 때에 대종사大宗師는 하늘이요 태양太陽이시라면 정산종사鼎山宗師는 땅이요 명월明月이시며, 대종사大宗師는 우리의 정신精神을 낳아주신 영부靈父시라면 정산종사鼎山宗師는 그 정신精神을 길러주신 법모法母시라 광대무량廣大無量 한 그 공덕功德을 만萬에 일一이라도 표기標記하고자 이 탑塔을 세우고 이에 명銘한다.
鼎山宗師 開闢繼聖 一以貫之 萬古信義 四大經綸 奉創大業
정산 종 사 개 벽 계 성 일 이 관 지 만 고 신 의 사 대 경 륜 봉 창 대 업
三同倫理 天下大道 道明德化 日月復明 法恩無量 天長地久
삼동 윤 리 천 하 대 도 도 명 덕 화 일 월 부 명 법 은 무 량 천 장 지 구
圓紀 五十六年 十月 七日 立
圓紀 七十三年 十一月 五日 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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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청하원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청하원-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청하원(益山聖地淸河院)
번호 : 교보 제1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중앙총부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으로 보이는 첫 건물입니다.
경성지부 교도였던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그의 아들 묵산 박창기 대봉도가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익산 중앙총부로 내려와 총부 구내에 사가로 지은 집입니다. 안채 6칸 겹집과 문간채 3칸을 건축하고 원기 19년(1934) 8월 20일 낙성하였으나 현재 문간채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시멘트 와가 우진각 지붕으로 외관은 유리 미서기문과 창호,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을 한 근대 주택입니다.
불법연구회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원기 21년(1936) 10월 이리경찰서 북일주재소가 설치되어 순사 2명이 상주하기도 했으며, 교단 제1대 성업봉찬회 출범 시에는 성업 봉찬회사무실 및 교단 제2대 및 대종사 탄생백주년 성업봉찬회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 원기 48년 수도원이 발족을 하면서 수도원으로 활용이 되다가 현재는 감찰원장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교반백년기념사업 때 정문 확장 공사를 하면서 담장과 문간채가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위원회가 원불교 익산성지 내 구조물 8건(대각전ㆍ청하원ㆍ구정원ㆍ정신원ㆍ본원실ㆍ금 강원ㆍ종법실ㆍ공회당)과 조형물 2건(대종사성탑ㆍ대종사성비)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될 때 함께 지정되었습니다.
청하원이라는 건물명은 구타원 이공주 종사의 아호 '청하淸河'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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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정신원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정신원-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정신원(益山聖地淨信院)
번호 : 교보 제3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정신원은 원기 26년 팔타원 황정신행이 중앙총부 구내에 있던 추산 서중안 대호법의 집터에 지은 사가입니다.
불법연구회 초대회장 서중안 대호법이 원기 12년 봄 가산을 정리하고 방 3칸 부엌 1칸의 안채와 헛간채를 지어 이사를 했으나, 서중안 대호법이 열반하고 그의 부인 칠타원 정세월이 전무출신을 단행하면서 의산 조갑종 부부가 들어와 살았습니다.
원기 28년(1943) 조갑종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자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가 아들 강필국의 수양을 위해 초가를 헐고 목조와즙 「ᄀ」자 곡두형 집을 건축하여 한때 사용하다가 총부에 희사했습니다. 외관은 유리 미서기문과 창호, 시멘트기와, 처마 끝의 함석차양을 한 근대주택입니다.
원기 31년 중앙총부에서 유일학림이 개원되자 학림장과 학감의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원기 33년 익산교당이 중앙총부에서 독립해 나가기 전 임시 교당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원기 45년 4월부터는 교서편수기관인 「정화사正化社」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원기 81년에는 정산 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실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원기 90년(2005)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위원회가 원불교 익산성지 내 구조물 8건(대각전ㆍ청하원ㆍ구정원ㆍ정신원ㆍ본원실ㆍ금강원ㆍ종법실ㆍ공회당)과 조형물 2건(대종사 성탑ㆍ대종사 성비)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될 때 함께 지정되었습니다. 건물명의 팔타원 황정신행의 이름 가운데 '정신淨信'에서 유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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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구정원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구정원-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구정원(益山聖地舊政院)
번호 : 교보 제4호(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원기 91년(2006) 5월 9일
원기 20년 3월 신영기 교도가 개인 주택으로 지은 근대 건축물로 원기 22년 그가 사업 관계로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에 건물을 희사하고 이사를 가자 이를 사무 공간으로 수리한 뒤 영춘원(현 구조실)에 있었던 불법연구회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구정원'이라는 이름은 훗날 제일 처음 교정원 사무실로 사용했다 하여 '옛날 교정원' 이란 뜻에서 붙여진 약칭입니다. 외관은 유리 창호로 이루어져 있고, 시멘트기와에 처마 끝은 함석차양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4간 겹집으로 현관이 있으며 별채로 2간이 있었는데 별채는 도서관으로 활용되다가 원기 25년 도서실이 신축되자 한때 창고로 사용하다가 원기 72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장실을 지었습니다.
원기 49년 8월 교정원이 사무실을 신축하여 이사를 하자 한때 식당과 남자 숙소로 사용하다가 반백년 기념사업 때 반백년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구정원은 원기 90년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위원회에서 원불교 익산성지 내 구조물 8건(대각전ㆍ청하원ㆍ구정원ㆍ정신원ㆍ본원실ㆍ금강원ㆍ종법실ㆍ공회당)과 조형물 2건(대종사성탑ㆍ대종 사성비)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할 때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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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숭산원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숭산원-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익산성지 숭산원
번호 : 교보 제5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98년(2013) 7월 9일
숭산원은 경성지부 창립주 가운데 한 사람인 진정리화의 사가가 있던 자리입니다.
진정리화는 충남 공주 출신의 실업가 박형균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뜻한 바 있어 불교에 귀의해 공주 갑사에 머물던 중 이동진화의 인도로 원기 15년 입교해 원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진정리화는 출가 승려로 생활을 하다 귀의한 까닭에 소태산 대종사의 여성 제자 중 최초로 삭발한 여성 제자가 되었으며 중앙총부 구내에 사가를 지어 생활하면서 동하선에 입선하는 것은 물론 대중들과 일과를 함께하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원기 19년에는 부군인 박형균을 소태산 대종사께 인도해 경성지부장으로 활동하게 했으며 원기 22년 가정사로 인해 중앙총부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귀가할 때는 자신이 살던 집을 소태산 대종사의 사가로 희사해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와 가족들이 안정된 거처를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장남이 숭산 박광전 종사가 원광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구 건물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한옥 와가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는 교정원장 관사 겸 귀빈용 숙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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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익산성지 익산성지 개교반백년기념관
-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익산성지 개교반백년기념관- 작성자
- 두레박
- 작성일
- 2024-05-17
명칭 : 개교 반백년 기념관
번호 : 교보 제6호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지정일 : 91(2006)년 5월 9일
원불교 개교 반백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원기 55년 3월에 영모전과 함께 착공하여 이듬해 9월 완공한 건축물입니다.
전 교도의 정성을 모아 지은 철근 콘크리트조 3층 건물로 연건평 6백 47평에 1천 28석의 좌석을 갖추었습니다. 반백년기념관 입구 벽면에는 대산종사가 제창한 반백년기념대회 주제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가 이산 박정훈 종사의 글씨로 부조되어 있습니다.
개관 당시 기념관 1층과 2층에는 1천여 석을 갖춘 대형 강당이 갖춰져 있었고, 1층에는 교정원 일부 부서들의 사무실이, 2층에는 중앙박물관 사무실이, 3층에는 중앙박물관 전시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반백년 기념관이 건축되면서 그동안 대각전에서 행해오던 중앙총부의 각종 기념행사가 이곳 반백년기념관에서 행해졌다.
하지만 원기 77년 5월 전기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내부가 완전 소실됨에 따라 이듬해 11월 재가출가 교도의 혈성어린 성금을 바탕으로 현재와 같은 1,500석 규모의 강당으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